건설업체에서 시작된 부실의 그림자가 조선업 해운업 저축은행 등으로 번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기업 부실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일치한다. 다시 한번 신속하고 단호한 기업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원칙도 명확하다. '모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고 '살릴 기업만 살려야 한다'는 것,'옥석'을 가리는 명확한 기준을 만들고 드러난 '환부'는 과감히 절제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구조조정 방식에 대한 수정은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한 구조조정 방식은 '프리 워크아웃',즉 사전 구조조정이다. 내년 이후 있을 기업 연쇄 부실에 대비해 살릴 기업은 충분한 유동성 지원을 해주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퇴출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와 은행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주단 협약 가입(건설사 대상)과 '패스트 트랙'(중소기업과 중소 조선사 대상) 등이 이러한 프리 워크아웃 방식의 구조조정이다.

하지만 당초 정부가 100대 건설사를 일괄 가입시키겠다고 장담했던 대주단 협약에는 고작 29개사만 가입했을 뿐이며,중소 조선사 구조조정도 소리만 요란했을 뿐 진척된 것은 없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부실을 안고 있는 저축은행에 대한 구조조정도 감감무소식이다.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은행과 기업 간 자율적 구조조정'에만 매달리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정부가 대주단 협약을 통한 건설사 구조조정을 시작했지만,구조조정은 책임을 은행에 넘기고 기업의 신청을 받아서 자율적으로 하는 형태로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며 "정부가 직접 원칙과 기준을 만들어서 강제적으로라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연구소 관계자도 "향후 은행에 대한 자본 확충 과정에서 정부가 은행들의 기업 구조조정 실적에 따라 지원 규모를 차등화하는 방식도 검토해야 한다"며 "반강제적으로라도 은행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 구조조정을 이끌 강력한 임시 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명확한 구조조정의 잣대를 정하고 이를 금융회사를 통해 기업들에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신속한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과거 미국에서는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강력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해칫맨(hatchet-man:도끼맨)을 뒀듯이 우리도 (구조조정의) 실권을 쥔 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출범시킨 기업재무개선지원단과는 별도로 한시적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총괄기구의 필요성도 대두된다.

김 원장은 "청와대에서 매번 경제부처 장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면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만 잔뜩 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독려하고 있지만 정작 경제부처 간에는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 정부 출범 직후 실시한 조직 개편에서 부처 간 혼선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옛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국을 떼어내 금융위원회로 통합하고,금융정책을 담당하는 금융위와 시장감독 기능을 맡는 금감원의 수장을 분리시키다 보니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정책 집행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경제부총리제를 부활시키거나 재정부 장관이 한시적으로 금융위원장을 겸직하도록 하자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지금처럼 부처 간 정책 협조가 안 될 경우 부총리 제도를 되살리는 것도 검토할 수 있겠지만,그러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라며 "그것보다는 비상시기에 맞는 한시적 총괄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지금 상황에서는 기존 조직 한곳에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거나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