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철 <부국장겸 경제부장 gwang@hankyung.com>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주말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경제위기 돌파 제언이 화제다. 바쁜데 한가한 짓 하지 말라는 비판에서부터 상황을 압도할 정도로 단호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헌재는 '해결사'였다. 외환위기 직후 부실한 금융회사들과 기업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강연장에 발디딜 틈이 없었던 것도 '왕년의 고수'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이 전 장관이 낫과 망치를 휘둘렀던 때는 지금과 상황이 달랐다. 당시에 곪아터진 쪽은 우리였다. 이번엔 미국이다. 당시에는 100조원이 훨씬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지금은 그렇게 많은 실탄을 짧은 시간에 마련할 형편이 안 된다. 그때가 구조조정의 메스를 들이대기가 훨씬 쉬웠다.

현 경제팀으로선 당시처럼 쾌도난마식 처리가 어려운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은 갈수록 높아간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전광우 금융위원장,박병원 경제수석 등은 억울해 할지 모른다. 그래도 어떡하랴.정부 판단보다 시장의 반응과 평가가 중요한 것을.

오랜 만에 현업 부장을 다시 맡게 된 기자에게 금융계 인사들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왔다. 은행원들은 대통령이 한 금리인하 발언의 부적절성을 지목했다. 대통령이 먹히지도 않을 말을 연일 토해내는 것은 민간 은행을 여전히 산하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금리인하가 그렇게 절박하다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깜짝 놀랄 만한 수준으로 내리거나 금리인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정부가 스스로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에는 각종 기금이 있다. 이 돈이 은행으로 들어간다. 이를 기관예금이라 부른다. 그들은 은행에 금리 입찰을 부친다. 높은 금리를 주는 은행을 선택한다. 비싸게 조달한 은행은 비싸게 대출할 수밖에 없다. 기금과 은행 모두 잘못한게 없지만 결과는 대통령의 희망과 달리 금리가 내려가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통령이 민간 은행에 금리인하 압박을 하려면 기관예금 같은 정부가 손 볼 수 있는 분야라도 제대로 처리한 뒤에 감놔라 배놔라 해야 한다는 얘기다. 민간은행을 잡도리하기 전에 국책은행의 역할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부실징후를 보인 중소 건설회사나 조선사들의 처리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태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뒤늦게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한 C&중공업 사례가 대표적이다.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이 선제적으로 움직였더라면 시장에 불확실성만 증폭시키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는 길이 보이는데도 어느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으려 하니 웅성거리는 잡음만 가득하다. 공무원들은 주요 정책 결정의 잘잘못을 사법적인 잣대로 단죄하려 했던 '변양호(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신드롬'에 걸려 책임있는 결정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전대미문의 위기라고 하는데 정부는 서로 미루는 형국이다.

외환위기 때처럼 폭탄이 터지진 않았지만 초침은 재깍재깍 돌아간다. 돌아오지도 않을 이헌재를 그리워할 필요는없다. 경제팀이 용기있게 나서면 위기돌파의 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