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 회장과 골프를 쳐본 이들은 혀를 내두른다. 카트도 타지 않고 줄곧 걸으면서 사업 얘기만 한다. 어쩌다 우스갯소리가 나와도 금세 사업 쪽으로 화제를 바꿔 놓는다. 끊임없이 말을 거는 바람에 플레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는 동반자들도 꽤 있다. 이처럼 사업 열정이 대단한 김 회장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어 진땀 깨나 흘렸다. 살 떨리는 승부였기 때문이다. 우선협상 대상자 지위를 거머쥐기까지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했다. 하나는 인수후보 1순위로 꼽히던 포스코를 넘는 일이었고,나머지 하나는 시장의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금융위기가 전 세계 시장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주력 계열사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등 경영 여건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일었다. 참모들은 인수에 따른 리스크를 시나리오로 묶어 보고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사업은 (결말을) 모르는 거다"고 임직원들을 다독이며 "비록 패할지라도 절대 포기하자 말라"고 했다.

그 뒤 포스코가 GS와 전격 컨소시엄을 구성하자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는 탄식이 인수팀에서 나왔다. 시장 역시 한화의 탈락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도 김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27년 동안 한화그룹을 이끌며 산전수전을 다 치른 백전노장이다. 사업가로서의 안목과 직감이 남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김 회장은 당시 이런 얘기를 했다. "오히려 쉬워졌다. 2 대 1로 싸우다가 이제 1 대 1로 맞설 수 있게 됐다(현대중공업은 애초부터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뭔가 졸속 합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50 대 50의 합작비율은 또 뭔가. 대우조선해양 같은 큰 기업을 절반씩 나눠서 가진다고? 노 웨이(No way)…."

결국 인수전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갔고 이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김 회장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룹의 한 인사는 "김 회장 스스로가 대천명(待天命)할 수 있을 만큼 진인사(盡人事)했다"고 전했다.

돌이켜보면 김 회장은 재계의 풍운아라 불릴 정도로 파란이 많았지만 선 굵은 경영 노선을 견지해왔다. 한화 정신인 신용과 의리를 바탕으로 믿고 맡기면서 중요한 시기에는 과감한 베팅으로 그룹을 이끌었다. 2차 오일 쇼크 후인 1983년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석유화학)을 사들일 때 모두가 '업황이 좋지 않다'며 반대했다. 경험 없는 총수의 객기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김 회장은 미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가 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인수를 성사시켰고 이 회사는 주력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2년 대한생명 인수 때는 직접 입찰제안서를 내러 금융감독위원회로 찾아가는 열정을 보였다.

선친(고 김종희 창업주)이 갑작스레 작고하면서 불과 29세에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때가 1981년 8월.그는 뒷날 "주위의 근심어린 시선들이 많았다"고만 회상했지만,얼마나 힘든 나날이었을지는 그 상황을 직면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쉽게 얘기하기 어렵다.

한치 흐트러짐없이 빗어 넘긴 '올백 머리'.윤기나는 검정색 또는 짙은 감색 수트 정장.상의 왼쪽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행커치프(액세서리 손수건),그리고 세련된 느낌의 커프스 버튼과 넥타이핀 세트.김 회장은 언제나 이처럼 액세서리까지 잘 갖춘 수트 정장 차림이다. 외부 행사 때는 물론 회사에서도 한결같다. 회장 취임 초기 아버지뻘 되는 50,60대 사장단으로부터 믿음을 얻기 위해서 옷차림 하나에서부터 스스로를 다그치며 리더의 자존을 지켜야 했다. 옛 재정경제부를 거쳐 한화에 몸담았다 한국투자공사로 자리를 옮긴 진영욱 사장은 "김 회장의 외부에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 모습은 다르다"며 "불 같은 성격이나 독단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솔선수범하고 정감어린 리더십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팔면서 "매각 대금을 깎더라도 고용을 승계해 달라"고 부탁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1999년에는 위기를 이겨낸 임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줄 때 이미 남의 회사 직원이 된 한화에너지 임직원들에게도 "미안하다"며 돈을 지급하기도 했다.

지금 김 회장은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절박한 숙제를 안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대해 비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고,그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대안과 기회를 먼저 생각한다. 그는 얼마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은 우리에게도 분명 시련이다. 하지만 어둠이 걷히기만을 기다려서는 결코 경쟁자를 앞서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떠나는 사람만이,새벽녘 기회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걷는 것을 즐긴다. 집이나 헬스클럽에서 거의 매일 러닝머신으로 한 시간가량 걷는다. 경영서와 로마역사 관련 서적을 좋아한다. 임직원들에게 '위대한 기업,로마에서 배운다'(윈앤윈북스 펴냄)의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최근엔 폴 케네디가 쓴 '강대국의 흥망'(한국경제신문 펴냄)을 다시 읽고 있다. 좌우명은 '필사즉생(必死則生)'.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씨의 장녀인 서영민 여사와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