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감사한 영원한 乙

경기도 인근에 적잖은 공장을 갖고 있는 S공업의 C사장은 허리가 부드러운 사람이다. 특히 공무원을 만나면 여지없이 구부러진다. 환갑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90도 각도가 나온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깍듯한 자세를 잊지 않는다. 처음 만난 공무원과 헤어질 때 그가 하는 인사말도 올해로 30년째 변함이 없다. "일간 전화 한번 올리겠습니다. "

속으로도 그럴까. 그가 술기운이 올랐을 때 떠봤다. '공무원에게 잘못 보이면 3대가 고생'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회사가 갖고 있던 골프장을 외환위기 때 팔아버린 정보통신업체의 L사장은 "정부 눈치 너무 본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공무원들의 부킹 부탁을 '원천 봉쇄'하게 돼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골프장을 판 뒤엔 주말이 휴가가 됐다. 예전엔 이 부처 저 부처 공무원들이 금요일 밤늦게 전화를 해서 토요일 황금시간대에 잡아달라는 건 예사였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규제와 인·허가권이 남아있는 곳에서 공무원은 기업인들에겐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갑(甲)'이다. 순환보직이다 뭐다해서 하도 많이 바뀌어서 해가 갈수록 갑이 늘어만 간다. 새로 올 때 마다 매번 붙잡고 설명하기도 어려워 그저 '있을 때 잘 할 뿐'이다. "만기없는 소멸형 보험을 들고 있는 셈"이라고 말하는 사장들도 있다.

고객,경쟁,글로벌 시장 같은 단어는 경영학 교과서나 경제신문에 나오는 것 일뿐,더 중요한 것은 공무원 같은 '힘있는' 집단과의 관계라고 믿는 사장들이 더 많다. 요즘 같은 구조조정의 시대엔 그 '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생존해야 성장도 있고 발전도 있다. 그러니 허리가 뭔 대수랴.담당 공무원이 자주 바뀌면,그 자리를 수십년째 지키고 있는 당신이 진짜 주인 아닌가.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구부리면 될 것이다.

"진짜 전화 하기는 하냐?"는 질문에 C 사장은 웃었다. "전화 올리면 욕먹어요. 다른 거 올리든지,모른척 해야지."

권영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