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미 <더모델즈대표 somi7@paran.com>

세상이 하 수상하다. 사익을 위한 은폐가 횡횡하고,공익을 위한 신뢰가 주저앉은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진실과 신뢰가 뒷받침되면 극복하지 못할 위기란 없다. 신뢰는 세상사의 기본이자 정석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쇼 프로젝트는 요즘 세상과 닮았다. 많은 사람들의 시샘과 질투 속에서 경쟁해야 하고,그럼에도 신뢰 없이는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이다. 한국의 패션문화가 글로벌 패션문화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직업적 사명감이다. 디자이너가 새 제품을 출시하듯 패션쇼 연출가는 그에 맞는 기발한 착상과 환상적인 무대,세계 바이어들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매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전문화된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출이 뒤따른다.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는 예산이 부족할 때가 다반사다. 비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해보기도 하지만 일단 최상이라 여겨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연출자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 각각의 역할을 맡고 있는 패션쇼 연출 관계자들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이디어에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노력대비 수익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필자는 부지런히 조명,음향,영상기기,영상,음악 등의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며 "힘들지만 작품 한번 만들어 보자"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느라 분주해진다. 이윤보다 중요한 무대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며 목이 쉬도록 설명하고 나면 그들의 마음도 움직인다. 물론 그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약속한 필자도 며칠씩 밤을 새가며 일하는 건 당연지사다.

패션쇼 연출 관련 전문 인력이 그리 많지 않아 쇼에 맞춰 준비 스케줄을 잡는 것도 아슬아슬하게 짜여질 때가 많다. 일반 공연 무대는 한 작품을 위해 열흘씩 리허설하고 무대 세팅을 하지만,패션쇼는 비싼 호텔이나 컨벤션센터 같은 큰 무대를 대여하기 때문에 길어야 하루 이틀,심지어는 8~10시간 안에 세팅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다음 무대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준비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다른 팀에서 방금 작업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필자의 무대 연출 비용이 다른 무대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볼멘소리도 한다. 그럼에도 졸린 눈 비벼가며 무대 세팅 작업에 몰두하는 그들의 모습은 지혜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막이 오르고 피날레가 울리면 동고동락한 서로를 위해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어느새 동지의식도 생겨 가족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가보다 보람을 함께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맛보는 우정.그런 게 진짜 신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