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38) 신신제약 ‥ 누구나 붙여본 '신신파스' 사위가 경영통증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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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창업후 파스시장 줄곧 선두
일본 수십차례 왕복 기술전수 받아
공학도 아들 대신 사위를 후계자로
수출 길 열리며 올해 매출 400억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신신제약 생산공장.내부에 들어가니 파스 특유의 톡 쏘는 멘톨 향이 코를 찌른다. 돌돌 말려진 부직포 원단이 차례 차례 도포(塗布·약 등을 겉에 바르는 것) 기계를 통과하자 순식간에 메틸살리신산과 멘톨 등이 함유된 파스 성분이 입혀진다.
이 곳에서 만들어 내는 파스는 연간 2억장 안팎.근육통을 잡는 데 특효약인 '전통 파스'에서부터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로 불리는 플라스타에 이르기까지 생산하는 종류만 20개가 넘는다. 여기에 '뿌리는 파스'와 각종 반창고까지 더하면 생산 품목은 80종을 헤아린다. 김한기 사장(55)은 "우리나라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신파스를 붙여 봤을 것"이라며 "파스 업계에서 신신파스의 브랜드 가치는 자동차 업계의 현대자동차에 맞먹는다"고 말했다.
제약업계에서 신신제약은 '파스 명가(名家)'로 통한다. 혈관을 확장해 주는 메틸살리신산과 후끈한 느낌을 주는 멘톨 등으로 만드는 '전통 파스'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서다. 비(非)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를 주 성분으로 하는 플라스타 시장에선 태평양제약의 '케토톱',SK케미칼의 '트라스트',제일약품의 '케펜텍'과 함께 4강 체제를 형성한다. 올해 예상 매출은 400억원 수준.파스 반창고 등 외용제(피부에 바르거나 붙이는 약)만으로 이 정도 매출을 올리는 제약사는 국내에서 신신제약이 유일하다.
신신제약의 출발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화학업체에 다니던 이영수 회장(81)이 지인 3명과 함께 신신제약을 설립한 것.국민 소득이 늘어나면 파스를 비롯한 의약품 수요도 그만큼 확대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었다.
하지만 3년간 계속된 전쟁은 신신제약을 '개점 휴업' 상태로 만들었다. 상황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밀수선을 통해 국내로 유입된 일본 파스에 비해 효능이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며칠씩 공장 문을 닫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성장을 위해선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이 회장은 주장했지만,동업자들은 "더 이상의 투자는 위험하다"며 선을 그었다. 급기야 이 회장은 1959년 동업자들의 지분을 인수,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1959년 이전의 신신제약은 '제약사'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기 때문에 회사의 공식 창립일도 1959년 9월 9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신신제약은 서서히 '파스 명가'의 모습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가 하면 영업망도 하나 둘씩 늘려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 단속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일본 파스가 자취를 감춘 것도 매출 확대에 도움이 됐다.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은 1969년에 마련됐다. 이 회장이 일본을 수십 차례 오가며 설득한 끝에 당시 일본 최대 파스업체인 니치반으로부터 파스 제작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게 된 것.새롭게 태어난 신신파스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자체 기술로 만든 신신파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신신파스는 1970~1980년대 대일화학공업의 '네오파스'와 국내 파스 시장을 양분하며 신신제약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이 김한기 사장에게 '러브 콜'을 보낸 건 1987년이었다. 사내에 금전 관련 사고가 잇따르자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부 관리를 맡겨야겠다'고 판단한 것.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병기 명지대 교수)은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자연스레 대한항공 로스앤젤레스(LA) 지사를 거쳐 미국 무역업체에 다니던 맏사위인 김 사장이 가업을 이을 적임자로 떠올랐고 김 사장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파스에 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장인과 국내 대기업 및 미국 기업에서 선진 경영 실무를 배운 맏사위는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며 호흡을 맞춰 나갔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태평양제약 SK케미칼 등 대기업 계열 제약사들이 앞다퉈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에 뛰어들면서 신신제약의 매출도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2000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 사장은 위기 타개책을 '선택과 집중'에서 찾았다. 회사의 역량을 파스를 포함한 외용제에 집중하기 위해 소화제 등 '먹는 약' 생산라인을 없애 버린 것.대신 2002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해외시장 개척에 힘을 쏟았다. 내부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했고 신(新)바람,신(信)뢰,신(神)들린 듯 일하자는 내용의 '3신바람' 운동을 전개했다.
결과는 대성공.향상된 품질 덕분에 수출길이 잇따라 열리면서 2000년 180억원 안팎이었던 매출이 올해 400억원 규모로 불어났다. 김 사장은 "근육통이나 관절염으로 고통받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등과 무릎에 신신파스를 붙일 수 있도록 세계시장 개척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오는 2012년까지 연 매출을 1000억원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산=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 연혁 ]
1959년 신신제약 창업
1967년 전일약품 인수합병
1969년 일본 니치반으로부터 기술 도입
1971년 의약품 수출 개시
1983년 수출 100만달러 달성
1987년 2대 김한기 사장 입사
1998년 경기도 안산으로 본사 이전
2000년 김한기 대표이사 취임
2002년 중앙연구소 설립
2006년 안산 제2공장 준공
2008년 500만달러 수출탑 수상
일본 수십차례 왕복 기술전수 받아
공학도 아들 대신 사위를 후계자로
수출 길 열리며 올해 매출 400억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신신제약 생산공장.내부에 들어가니 파스 특유의 톡 쏘는 멘톨 향이 코를 찌른다. 돌돌 말려진 부직포 원단이 차례 차례 도포(塗布·약 등을 겉에 바르는 것) 기계를 통과하자 순식간에 메틸살리신산과 멘톨 등이 함유된 파스 성분이 입혀진다.
이 곳에서 만들어 내는 파스는 연간 2억장 안팎.근육통을 잡는 데 특효약인 '전통 파스'에서부터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로 불리는 플라스타에 이르기까지 생산하는 종류만 20개가 넘는다. 여기에 '뿌리는 파스'와 각종 반창고까지 더하면 생산 품목은 80종을 헤아린다. 김한기 사장(55)은 "우리나라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신파스를 붙여 봤을 것"이라며 "파스 업계에서 신신파스의 브랜드 가치는 자동차 업계의 현대자동차에 맞먹는다"고 말했다.
제약업계에서 신신제약은 '파스 명가(名家)'로 통한다. 혈관을 확장해 주는 메틸살리신산과 후끈한 느낌을 주는 멘톨 등으로 만드는 '전통 파스'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서다. 비(非)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를 주 성분으로 하는 플라스타 시장에선 태평양제약의 '케토톱',SK케미칼의 '트라스트',제일약품의 '케펜텍'과 함께 4강 체제를 형성한다. 올해 예상 매출은 400억원 수준.파스 반창고 등 외용제(피부에 바르거나 붙이는 약)만으로 이 정도 매출을 올리는 제약사는 국내에서 신신제약이 유일하다.
신신제약의 출발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화학업체에 다니던 이영수 회장(81)이 지인 3명과 함께 신신제약을 설립한 것.국민 소득이 늘어나면 파스를 비롯한 의약품 수요도 그만큼 확대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었다.
하지만 3년간 계속된 전쟁은 신신제약을 '개점 휴업' 상태로 만들었다. 상황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밀수선을 통해 국내로 유입된 일본 파스에 비해 효능이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 며칠씩 공장 문을 닫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성장을 위해선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이 회장은 주장했지만,동업자들은 "더 이상의 투자는 위험하다"며 선을 그었다. 급기야 이 회장은 1959년 동업자들의 지분을 인수,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1959년 이전의 신신제약은 '제약사'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기 때문에 회사의 공식 창립일도 1959년 9월 9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신신제약은 서서히 '파스 명가'의 모습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가 하면 영업망도 하나 둘씩 늘려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 단속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일본 파스가 자취를 감춘 것도 매출 확대에 도움이 됐다.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은 1969년에 마련됐다. 이 회장이 일본을 수십 차례 오가며 설득한 끝에 당시 일본 최대 파스업체인 니치반으로부터 파스 제작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게 된 것.새롭게 태어난 신신파스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자체 기술로 만든 신신파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신신파스는 1970~1980년대 대일화학공업의 '네오파스'와 국내 파스 시장을 양분하며 신신제약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이 김한기 사장에게 '러브 콜'을 보낸 건 1987년이었다. 사내에 금전 관련 사고가 잇따르자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부 관리를 맡겨야겠다'고 판단한 것.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병기 명지대 교수)은 컴퓨터공학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자연스레 대한항공 로스앤젤레스(LA) 지사를 거쳐 미국 무역업체에 다니던 맏사위인 김 사장이 가업을 이을 적임자로 떠올랐고 김 사장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파스에 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장인과 국내 대기업 및 미국 기업에서 선진 경영 실무를 배운 맏사위는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며 호흡을 맞춰 나갔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태평양제약 SK케미칼 등 대기업 계열 제약사들이 앞다퉈 '붙이는 관절염 치료제'에 뛰어들면서 신신제약의 매출도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2000년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 사장은 위기 타개책을 '선택과 집중'에서 찾았다. 회사의 역량을 파스를 포함한 외용제에 집중하기 위해 소화제 등 '먹는 약' 생산라인을 없애 버린 것.대신 2002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해외시장 개척에 힘을 쏟았다. 내부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했고 신(新)바람,신(信)뢰,신(神)들린 듯 일하자는 내용의 '3신바람' 운동을 전개했다.
결과는 대성공.향상된 품질 덕분에 수출길이 잇따라 열리면서 2000년 180억원 안팎이었던 매출이 올해 400억원 규모로 불어났다. 김 사장은 "근육통이나 관절염으로 고통받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등과 무릎에 신신파스를 붙일 수 있도록 세계시장 개척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오는 2012년까지 연 매출을 1000억원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산=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 연혁 ]
1959년 신신제약 창업
1967년 전일약품 인수합병
1969년 일본 니치반으로부터 기술 도입
1971년 의약품 수출 개시
1983년 수출 100만달러 달성
1987년 2대 김한기 사장 입사
1998년 경기도 안산으로 본사 이전
2000년 김한기 대표이사 취임
2002년 중앙연구소 설립
2006년 안산 제2공장 준공
2008년 500만달러 수출탑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