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제 기자의 1일 구세군 활동기

꼬깃꼬깃 지폐 한장에 쑥쓰러운 듯 천금같은 미소 얻는 사람들 줄이어


분명 하얀색이었을 것이다. 10년은 더 입은 듯 보이는 잠바의 색깔은 먼지로 가려져 검은지 하얀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이른바 '몸빼바지'에 잠바 하나를 걸친 그 노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몇 년은 감지 않았을 산발한 머리의 노인은 굽은 허리를 손으로 감싸고 고통스럽게 빨간 냄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춤에서 꺼낸 동전 한닢.땡그랑 소리와 함께 냄비 속으로 떨어진 동전에는 고액권 지폐가 보여주지 못한 감동이 담겨 있었다. 다시 삶의 현장으로 떠나는 그 노인의 입가에는 사람을 살리는 '살인미소'가 어려 있었다.

2008년 겨울 대한민국은 결코 춥지 않았다. 은은한 종소리와 함께 겨울을 반겨주는 빨간 자선냄비에는 갑남을녀들의 사심없는 기부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전 한닢,꼬깃꼬깃한 지폐 한장으로 미소를 얻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겨울은 따뜻한 계절임이 분명했다.

9일 오후 12시부터 저녁 8시까지 서울 명동거리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일일자원봉사자로 참여해 겨울을 덥혀주는 사랑의 온기를 직접 느껴보았다.

12시 구세군 버스가 명동 대로변에 도착하자 구세군 사관학생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점심을 먹으러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리에 나가야 하기 때문.빨간 점퍼를 걸치고 '사랑의 종'을 든 채 자선냄비 앞에 섰다. 이날 모금활동을 함께 할 사람들은 구세군 사관학교의 생도인 이문재(40),박충실(31)씨.두 사람 다 어렸을 적부터 구세군 봉사활동을 해온 베테랑들이다. 이들과 한시간씩 교대로 종을 치며 모금활동을 하는 것이 오늘의 임무였다.

딸랑딸랑.경쾌한 종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약간의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내 이어지는 기부자들의 행렬에 민망함은 사라졌다. 기부자들은 노숙자에서부터 손을 맞잡은 젊은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은 돈을 넣은 뒤 환한 미소를 머금고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는 점.거리의 기부자들은 자신의 선행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청년은 "요즘 경기가 어렵다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 힘들지 않겠냐"며 "주머니 속의 적은 돈으로나마 그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구세군 측에 따르면 불황에도 기부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고 한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거액의 기부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내는 1000원짜리 한장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경기가 어려우면 기업체나 유명인들의 거액 기부는 줄지 몰라도 일반인들의 기부는 더 늘어난다는 얘기다. 이렇게 모여진 돈은 노숙자,소년소녀 가장,독거노인 등을 위해 쓰인다. 박충실씨는 "자선냄비의 모금액은 다들 어렵다고 말했던 IMF때 오히려 더 많았다"며 "올해도 예년보다 많은 성금액이 걷히고 있으며 지난해보다 1억여원 가량 늘어난 목표액인 32억원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여 동안 한 자리에서 종을 치자 팔 근육이 끊어질 듯 땡겼다. 교대를 위해 구세군 버스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다리가 굽혀지지 않아 애를 먹어야 했다. 기자를 지켜보던 이문재씨가 웃음을 터뜨리며 조언했다. "종을 칠 때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끊어쳐야죠.그리고 종을 치는 동안 조금씩 움직여줘야돼요. 안 그러면 오래 못해요. "버스를 타자 동료 구세군들이 수고했다며 반긴다. 평상시에는 노숙자들에게 식사제공할 때 쓰인다는 구세군 버스 뒷편에는 바닥에 담요가 깔려 있었다. 12월 한 달동안 단 하루만 쉬고 주말도 없이 모금활동을 펼쳐야 하는 구세군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생리현상은 지하상가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서 해결했다.

달콤한 휴식시간은 잠시.1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명동에서 활동하는 구세군은 모금활동만 하는게 아니다. 관광객이 많은 명동의 특성 상 영어와 일본어로 관광객에게 길안내를 해주고 가끔은 교통정리까지 해야한다. 이날도 마찬가지.10여분에 한번씩 '남대문'이 어디있냐고 물어보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촬영에 고맙다며 10원짜리를 넣고가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있었다. 이문재씨는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구세군을 정복을 차려 입은 경찰로 오해해 신기하게 쳐다보고 사진촬영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로 80주년을 맞은 한국의 구세군에는 숨은 조력자들이 많다. 기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주변 상인들도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구세군 모금활동이 펼쳐지는 12월 한 달동안 내내 들어야 하는 종소리와 확성기 소리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이들은 가끔 오며가며 기부를 하기도 하고 무거운 장비를 밤새 보관해주기도 한다. 명동의 한 순두부집에서는 구세군이 오면 50% 할인혜택을 주고 있기도 하다. 박충실씨는 "초창기에는 술을 마시고 '내가 불우이웃이니 돈을 내놓아라'며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며 "주변 상인분들 같이 숨은 조력자들의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명동 거리에 어둠이 내려오고 네온싸인이 빛을 발하자 캐롤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세군 악대가 경쾌한 연주를 펼치자 사람들의 기부행렬도 더 잦아졌다. 8시가 되자 구세군은 무거워진 자선냄비를 차로 옮기고 철수할 준비를 시작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고 팔다리는 뻐근했지만 20년간 모금활동을 해왔다는 박충실씨는 더 없이 활기차 보였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박씨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남을 위해 스스럼 없이 자신의 돈을 내는 것을 보면 순간 순간이 감동"이라며 "자신도 어려울텐데 기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이 느껴져 행복하다"고 말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유치환 시인의 시 '행복'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이 평범한 진리를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에 기자도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었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