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와 뉴라이트연합이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겠다는 운동이 학계의 냉담과 갈등 속에 진행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를 긍정적으로 보자는 충정이야 좋지만, 무엇을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는 당연히 이론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 서술의 '좌편향'을 당장 '우편향'으로 바꿔놓고 말겠다는 명백하고도 조급한 의도는 시간이 지난 다음 정당성 자체를 그르칠 수도 있다.

역사 서술에 의도가 과잉반영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조선 18대 국왕 현종 이연(顯宗 李 木+淵)이 좋은 예다. 조선왕조실록 중 기존 실록의 개서가 이뤄진 것은 선조와 현종, 경종 3대뿐이다. 이 중에서도 현종 대는 가장 대대적으로 개정된 경우로,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이란 상반된 두벌의 버전이 들어 있다.

현종은 참으로 운이 없는 왕이었다. 그는 국왕 중 유일하게 '오랑캐 땅' 태생이었다. 병자호란뒤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의 인질로 끌려간 봉림대군이 만주 심양에서 그를 낳았던 것이다. 최대 약점은 종법을 무시한 왕위계승이었다. 삼전도의 치욕에 과민했던 할아버지 인조가 일찍이 왕세손으로 대못질해놓은 덕에 왕이 됐지만, 의문사한 소현세자의 적통 장자가 엄연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짧은 15년 치세를 대표하는 예송(禮訟)문제가 바로 그랬다. 부왕 효종(孝宗)과 어머니 인선왕후의 두차례 상례때 할머니 자의대비가 복상을 몇년동안 하느냐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맞붙었는데, 이는 인조의 무모한 원모심려가 자초한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식민사학은 국가 수뇌부가 기껏 아녀자 복상문제로 지샜다고 매도하지만, 예교국가 조선의 왕실전범 논쟁은 요즘으로 치면 친미냐 친중이냐 하는 메가톤급 국기문제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현종은 즉위초 왕권강화파인 남인 대신 사부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 신권(臣權)파 편에 섬으로써 평생 그의 위세에 눌려지내야 했다. 즉위 2년만에 원자(후일 숙종)가 태어난 일 때문에 송시열로부터 '부왕 상중에 합방했다'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판세를 읽을 나이가 된 그는 마침내 허적을 비롯한 남인을 대거 중용하면서 서인견제에 나섰다.

자연환경도 그에겐 우호적이지 않았다. 즉위 9년째인 1670년과 71년 5대 재해가 세트묶음이 돼 덮치면서, 당시 추산인구 51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아사했다. 유명한 경신(庚辛)대기근이다.

현종 사후 3년만에 집권파인 남인이 주도한 '현종실록'이 완성됐다. 그러나 3년만인 1680년 정권교체로 집권한 서인은 '잘못이 많고 편파적'이란 이유로 서둘러 '현종개수실록'을 완전히 새로 썼다. 물론 남인의 실정을 도드라지게 부각하고 자기네 평가는 미화했다. 두 버전의 실록을 비교하면 유한한 인간이 장구한 역사 위에 까불어놓은 흔적에 그저 실소하게 된다.

역사의 평가는 항상 변한다. 그런데도 집권세력은 역사서술을 뒤바꿔놓기만 하면 그 역사가 영원히 갈 듯이 여긴다. 그런 조급성으로는 역사가 달라지지 않는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