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배 <정치부장 khb@hankyung.com>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여야 합의정신은 사라졌고 야유와 고성,몸싸움 등 구태가 그대로 재연됐다. 국회가 지난 13일 민주당과 민노당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내년도 예산안 284조5000억원을 처리했다. 18대 국회 첫 예산안 심의였고 경기침체를 감안해 여야가 예년보다 빨리 처리키로 약속했으나 정쟁의 악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야가 삼류 정치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기쁜 소식은 없고 어두운 소식뿐이어서다. 한국은행은 지난주 우리나라의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2%에 머물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고용상황 역시 심각하다. 신규 취업자는 올해 14만명보다 훨씬 적은 4만명에 그칠 전망이다. 내년 상반기엔 갖고 있는 일자리마저 4만개 줄어든다고 한다. 국회가 의결한 예산안 284조원은 4%대 성장에 맞춰 잡은 것이어서 상황은 더욱 우려된다. 한마디로 내년엔 혹독한 불황바람을 서민들이 감내해야 한다.

여야가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감정의 골을 메우고 본격적으로 민생을 돌봐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정부가 내놓은 경기 부양대책 규모는 33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3.7%에 불과하다. 미국과 일본이 발표한 GDP 6~7%수준의 경기부양규모에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치다. 미국 정부는 금융회사 회생과 금융시스템 정상화를 목적으로 투입하겠다고 밝힌 공적자금이 1조8000억달러에 달했고,상황에 따라 2조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다. 일본 역시 경기부양을 위해 총40조엔(600조원)규모를 투입한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올인'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우리 정부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때문에 신속한 경기부양과 함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지난주 기자가 만난 한 중진 정치인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100조~150조원 규모의 공적자금 조성을 역설했다. "추경과 감세를 통한 경기진작책은 한계가 있으며 미국과 일본처럼 과감한 위기돌파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10년 전 IMF사태가 발생했을 때 168조원의 공적자금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않았는가"라는 게 요지였다.

물론 공적자금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는 부정적인 게 사실이다. 대다수가 부실운영한 금융회사를 어떻게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할 수 있느냐며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10년 전의 공적자금은 이미 발생한 부실을 처리하기 위한 사후적 조치였고, 지금은 부실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적 조치가 될 것이라며 공적자금 옹호론을 제기하고 있다.

사연이야 어떻든 예산안은 이미 처리됐다. 정부는 자금배정을 조기에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 전체예산의 60%를 풀어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정치권도 이제부터 정쟁의 틀을 벗어던지고 다양한 경기부양책 논의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기부양을 위한 공적자금의 필요성을 놓고 공론화에 나서는 것부터가 새로운 국면 전환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