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오석송 대표는… 치과재료 사업 '한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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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사장은 당초 상업고등학교 출신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탄탄한 중견기업에서 '재무통'으로 경력을 쌓던 그의 가슴 속에 '아메리칸 드림'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언젠가 미국 땅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한 차례 홀로 이태원 술집을 찾았고,차츰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친분이 쌓인 외국인도 생겼다. 치과용 충전재를 생산하는 한국슈어프로덕트의 하워드 리 대표도 그런 외국인 중 하나였다. 오 사장은 그의 눈에 들어 1987년 한국슈어프로덕트의 관리이사로 영입됐다.
하지만 극심한 노사 분규 탓에 생산이 중단되는 일이 잇따르자 리 대표는 1988년 말 회사를 오 사장에게 넘기고 한국을 떠났다. 오 사장은 아파트 매각 대금과 은행 대출 등을 통해 마련한 3억여원으로 임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지급했지만 노조는 '미국놈 앞장이 오석송은 자폭하라'는 현수막을 오 사장이 사는 아파트에 내거는 등 협박과 무리한 요구로 일관했다. 결국 오 사장은 1989년 9월 노조에 회사를 넘겨 주고 손을 털었다. 첫 번째 실패였다.
1년여간 '백수'로 지낸 오 사장은 인도네시아에서 재기를 시도했다. 사업 아이템은 역시 치과용 충전재였다. 하지만 친인척에게 35만달러를 빌려 현지에 세운 공장이 망하기까지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생산성이 한국의 10%에 불과한 데다 품질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도전은 '자살 소동' 직후인 1993년 9월에 시작돼 성공적인 결실을 맺고 있다. 오 사장은 "최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현지법인을 세운 데 이어 세계 최대 치과재료 공급업체인 미국 덴스플라이에 3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계약을 연말께 맺을 계획"이라며 "방식은 다르지만 20년 전 꿈 꿨던 '아메리칸 드림'이 어느 정도 실현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극심한 노사 분규 탓에 생산이 중단되는 일이 잇따르자 리 대표는 1988년 말 회사를 오 사장에게 넘기고 한국을 떠났다. 오 사장은 아파트 매각 대금과 은행 대출 등을 통해 마련한 3억여원으로 임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지급했지만 노조는 '미국놈 앞장이 오석송은 자폭하라'는 현수막을 오 사장이 사는 아파트에 내거는 등 협박과 무리한 요구로 일관했다. 결국 오 사장은 1989년 9월 노조에 회사를 넘겨 주고 손을 털었다. 첫 번째 실패였다.
1년여간 '백수'로 지낸 오 사장은 인도네시아에서 재기를 시도했다. 사업 아이템은 역시 치과용 충전재였다. 하지만 친인척에게 35만달러를 빌려 현지에 세운 공장이 망하기까지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생산성이 한국의 10%에 불과한 데다 품질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도전은 '자살 소동' 직후인 1993년 9월에 시작돼 성공적인 결실을 맺고 있다. 오 사장은 "최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현지법인을 세운 데 이어 세계 최대 치과재료 공급업체인 미국 덴스플라이에 3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계약을 연말께 맺을 계획"이라며 "방식은 다르지만 20년 전 꿈 꿨던 '아메리칸 드림'이 어느 정도 실현된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