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기 < 단국대 교수 ㆍ경제학 >

지난 11월 필자는 현대자동차 체코 공장과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과거 선진국 자동차 업체들의 눈부신 활약과 상대적으로 초라했던 국내 자동차 산업을 비교하며 '과연 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자문했던 필자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유럽 공장을 보면서 지난 20여 년 세계 자동차산업의 부침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자동차 산업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지금,자동차 산업의 맹주였던 미국의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가 파산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부하는 도요타도 감산과 감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이러한 가운데 방문한 현대차와 기아차의 유럽 공장을 둘러보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현대ㆍ기아차는 자동차산업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을까.

이 두 공장은 생산성과 품질에 관한 한 세계 어느 자동차 공장보다도 탄탄한 경쟁력을 갖췄다고 하는데,생산설비와 장비는 모두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고 노하우에 속하는 생산라인 편성이나 운용방식도 작업자들의 편의를 높이도록 설계됐는데 이것도 자체 기술이었다. 기술이전을 극도로 막았던 일본 자동차회사의 견제와 미국과 유럽 자동차시장의 냉대 속에서 국내 자동차 회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신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해마다 파업을 반복하는 국내 공장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 노사가 국내 자동차공장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기아차는 회사가 고용 안정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노조가 인력을 다른 생산라인에 투입하는 전환배치제와 여러 차종을 동시에 생산하는 혼류(混流) 생산 등 유연 생산체제를 구축하는데 합의했다. 현대차 노사도 단종되는 에쿠스 생산라인 근로자 전원을 다른 생산라인으로 전환배치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그동안 국내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은 이러한 '작은' 문제도 합의하지 못할 정도로 대립적이었다. 전환배치와 유연 생산체제는 외국 자동차공장에서는 논란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상식적인 제도지만 국내 자동차 노동조합은 노동 강도가 커진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해왔던 것이다.

노사관계가 이렇게 경직되다 보니 국내 자동차공장의 경쟁력도 저하되었다. 완성차 한 대를 조립하는데 걸리는 시간만 보더라도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은 19.4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기아차 국내 공장은 무려 40시간이나 걸린다. 실제 근로시간도 슬로바키아 공장은 90%를 넘는데 반해,국내 공장은 60%에도 미치지 못한다. 노사문제 때문에 제 발등에 도끼 찍는 식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이제라도 전환배치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한 것은 노사관계에 '큰' 변화를 의미하며,노사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내려는 강력한 의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내 자동차 공장은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세계 자동차산업의 부침과 판도변화가 주는 준엄한 경고다.

1980년대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일본 자동차와 비교해 생산성,품질,가격 모든 부문에서 뒤처지자 노사관계를 변화시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찔끔거리는 변화에 머물다가 결국 기울어지는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미국 자동차산업은 파산과 대량 실직의 문턱에 서 있다. 국내 자동차회사가 노사관계를 전면 혁신하는데 당장 나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