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연말을] 가난ㆍ차별ㆍ뒤틀린 욕망이 만든 '섬뜩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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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보다 버거울 만큼 잔인할 때가 있다. 김숨씨의 두번째 장편소설 ≪철≫(문학과지성사)은 산업사회에서 노동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힘겨운 모습을,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민음사)과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뿔)는 인디언 사냥이 존재하던 미국 역사와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시기를 각각 다룬 작품이다.
김씨의 ≪철≫은 철을 위해 노동하다 결국 철에 먹혀버리는 한 마을의 이야기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소는 희망이다. 건장한 마을 남자들이 조선소에서 일자리를 얻으면서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윤택해진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철을 생계 수단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노인들은 멀쩡한 이빨을 뽑아 쇠로 된 틀니를 해넣고,벙어리 자식을 고쳐보겠다고 한 솥이나 되는 녹을 먹이다가 도리어 자식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체상 약점 때문에 조선소에 취직할 수 없었던 꼽추는 쇠로 된 틀니를 해주며 많은 돈을 벌어들이지만,조선소에서 일할 수 있는 튼튼한 자식에 대한 욕망에 집착한다.
마을은 점점 녹으로 뒤덮여가고 조선소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비극이 닥쳐온다. 그동안 조선소에서 사람들이 흘린 땀의 결과물인 철선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마을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비참한 쇳내가 끈덕지게 풍겨온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로드≫의 작가 맥카시의 장편소설 ≪핏빛 자오선≫ 1850년대 미국 서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열네살 되던 해 집을 나온 소년이 살인과 인디언 사냥이 판치는 미국 서부에 온다. 그 역시 어린 나이에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감옥까지 가게 된 소년은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 돈을 버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다 소년의 무리는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아 종말을 맞고,가까스로 살아남은 소년은 30여년 후 중년 남자가 된다. 온갖 일을 겪었지만 소년은 완전히 더럽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 또한 결국에는 죽음을 맞으면서 세상에 남아 있던 가냘픈 희망 한줄기도 부서져 버린다. 소설은 피비린내가 넘치는 소년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세상의 어두운 본질을 드러낸다.
소설가이면서 희곡작가,재즈 트럼펫 연주자이자 대중음악 작사가로 다채로운 인생을 살았던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인종 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인 리 앤더슨은 흑인 혼혈이지만 금발에 하얀 피부를 지녀 겉보기에는 백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는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백인들에게 살해당한 남동생이 있다. 리 앤더슨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희생양을 물색하던 끝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루와 진 자매를 찾아낸다. 두 자매에게 접근하고 이들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 그는 한명씩 살해한다. 인종 차별이 만든 살인마의 행각과 파국을 도덕적 판단의 개입 없이 써내려간 누아르 소설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