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광수 변호사는 아직도 지난 2003년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딱 5년'만 공부하겠다고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 5년차에 결국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 난 딸은 이미 "아빠가 변호사"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를 악물고 재도전한 그는 2005년 47회 사법시험에 합격,올해 개업 변호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변호사로서 첫 번째 수임한 사건은 상속 사건이었다. 당사자들 간 조정으로 끝나 첫 사건 치고는 만족스런 결과였다. 그가 1년간 터득한 소송 승리의 비법은? 사건 당사자와 변호인 그리고 이 둘의 주변 사람들,이 3자가 오케스트라처럼 혼연일체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 제의만 받아도 새벽 3시까지 잠이 안 옵니다. 출근할 때도 그 생각,화장실에서도 그 생각뿐"이라는 새내기 변호사.그가 지난 1년간 수임한 건수는 국선 변호를 포함해 두자릿수다. "세자릿수에 가까운 두자릿수냐"고 넌지시 물어보니 "전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어렵다는데….초임 변호사가 첫술에 배부를 리 없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가장 기억나는 사건으로는 방화 사건을 꼽았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올해 중순,고깃집을 운영하던 한 40대 남자가 장사가 안되는 것을 비관해 부부싸움 후 술김에 가게에 불을 질러 버린 사건이다. 여 변호사는 피의자가 구속된 상태에서 국선 변호인으로 이 사건을 맡았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이사르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공익과 사익을 함께 조화시켜라.' 변호사는 그런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카이사르의 말을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 그는 결국 법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냈다. 사건 수임료는 고작 30만원.그러나 이후 그 피의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41세의 늦깎이 변호사는 1991년 한양대 법대를 졸업한 후 군 복무를 마치고 93년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험 준비는 녹록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일 때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기업이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세상을 움직이는 주역으로 올라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결국 그는 기업 최전선에 뛰어들기로 마음 먹고 1994년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린 지 5년. IMF 시기를 거치며 잘나가던 수백 개 대리점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

"전문가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오늘날의 여 변호사를 있게 한 배경이다.

2003년 포기냐 재도전이냐 기로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자극을 줬던 그의 딸은 최근 또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고 한다.

"애 엄마가 초등학교 일일 교사로 아빠가 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니 딸이'아빠는 잘나가는 변호사가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이거 눈 부릅뜨고 성공한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뜨이던데요,하하."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