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전쟁이 한창인 야전 병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중상을 입고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하는 병사들이 넘쳐난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중상을 입은 병사들의 생존 여부는 전적으로 군의관(연방 정부) 의지에 달렸다. 어쩌다 다쳤는지 따지기에 앞서,살리느냐 죽도록 놔두느냐를 결정하는 작업이 계속됐다. 구제금융(베일아웃)은 시스템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방치만 예외였다.

미국 정부는 탐욕과 방종에 젖어 만신창이가 된 월가 금융사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 다 들어줬다. 신용공황으로 돈이 돌지 않으면 이런 저런 명목으로 돈을 풀어줬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갖고 있던 국채와 현금은 월가 금융사로 가고 대신 시장에서 유통이 안되는 기업어음(CP) 등 리스크 있는 증권이 FRB 금고로 들어왔다. 이렇게 지원된 돈만 1조4000억달러가 넘는다. 심지어 FRB는 소비자금융 관련 증권을 보유한 헤지펀드에도 자금을 풀기로 결정했다.

재무부는 총 3980억달러를 자본 참여방식 등으로 지원했다. 은행들의 자본 확충에 2500억달러를 투자했고,국책 모기지(주택담보대출) 회사인 프레디맥 등에 140억달러를 투입했다. 모기지 자산을 사는 데 490억달러를 썼다. AIG 씨티그룹 구제에도 앞장섰다. 씨티를 살리는 데는 부실자산(3060억달러)에 보증을 서주는 수단까지 동원했다. 머니마켓펀드(MMF)도 지급을 보장해줬다. '엉클 샘'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들이다. '도덕적 해이' 논란이 없진 않았지만 워낙 위기감이 컸던 탓에 반대 여론은 묻혀버렸다.

하지만 천문학적 혈세를 지원받았는데도 월가의 무분별한 타성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AP통신이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 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파산 위기를 넘기기 위해 대규모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던 미 주요 은행들이 지난해 경영진에게는 무려 16억달러 규모의 보수와 성과급,각종 혜택을 제공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월가 금융사 최고경영자(CEO)에게선 분별없고 태만했던 경영 행태에 대한 반성의 소리를 별로 들을 수 없다. 아직도 최고경영층이 보너스를 받네 안 받네 하는 얘기가 나온다. 월가 금융사들의 집단적인 잘못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고민하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곳도 없다. 경영진은 책임지지 않고 회사 직원들만 대규모 조정을 단행했다. 씨티 집행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은 오히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모두의 잘못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인식이 월가에 팽배해 있다.

신용위기가 터진 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지금까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정작 월가 금융사들은 너무 빨리 평온을 되찾는 듯하다. 이머징마켓 국가 은행들은 달러 차입을 못해 아우성인데 월가 금융사들은 뭉칫돈을 깔고 앉아 소나기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금융사는 변하기 어려운지 모른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 강력한 월가 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웬만한 감독시스템으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뉴욕 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