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검은 갈매기도 단박에 불러앉힌 '승부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 10일 롯데장학재단 설립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53)이 나타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질문을 쏟아냈다.
"두산주류를 인수하실 건가요?""12일 열리는 두산주류 입찰에 참여하시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신 부회장은 곧 미소를 짓고 짤막한 대답을 남긴 채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노코멘트입니다. " 두달여 전 유진투자증권 인수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는 "관심없다"고 잘라 말한 것과는 다른 '긍정'의 멘트였다. 롯데는 12일 두산주류 매각 입찰에 참여했고 22일에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됐다.
신 부회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최근 들어 유통ㆍ금융가에 인수합병(M&A) 얘기가 나올 때마다 늘상 돈 많은 롯데가 '인수후보 1순위'로 거론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차남인 신 부회장은 15년간 경영수업을 끝내고 2004년 10월 그룹 정책본부장을 맡으면서 롯데의 '얼굴'이 됐다. 신 회장이 여전히 건재하고 주요 사안의 최종 결정을 내리고 있지만 이제 롯데가 돈을 어디에 쓸지는 신 부회장에 달려 있다.
신 부회장은 '글로벌 신'이라고 불린다. 1년 중 100일 이상을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 해외에서 보내며 롯데의 글로벌화를 진두지휘한다. 또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1982년부터 노무라증권 영국 런던지점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흐름을 파악하는 안목이 남다르다는 평가다.
특히 그가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몰락과 미국발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견한 점은 불황에도 롯데가 잘 나갈 수 있는 이유의 하나다.
신 부회장은 올초 그룹 임원회의에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해 전례 없는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으니 미리 운영자금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9~10월 롯데호텔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 등 주요 계열사들이 일본 유럽 등지에서 저리로 무보증 회사채 등을 발행해 약 1조원의 외화자금을 조달하게 된 배경이다.
지난 9월초 구영훈 롯데경제연구소장이 내년 한국 경제가 3.3% 성장할 것이란 전망을 보고했을 때 신 부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데 너무 낙관적으로 예상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연구소는 이후 글로벌 경제 환경이 급속히 나빠지자 지난달에 전망치를 1.7%로 대폭 낮췄다. 구 소장은 "(신 부회장은) 글로벌 컨설팅회사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세계 각국을 누비면서 쌓은 현장감각으로 경제를 파악하는 식견이 전문가 수준"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신 부회장은 아버지의 경영 스타일을 그대로 빼닮았다. 신격호 회장의 모토인 '포장하는 것을 멀리하고 실익을 챙긴다'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얘기다.
신 부회장은 현대석유화학 2단지(롯데대산유화) 우리홈쇼핑(롯데홈쇼핑) 대한화재(롯데손해보험) 등 알짜 기업을 인수해 실속을 챙겼지만 조단위의 대형 M&A에선 번번이 물러났다.
때문에 '통이 작다'는 비판도 받지만 '좋은 물건이라도 적정가격보다 비싸면 사지 않는다'는 M&A 원칙은 철저히 지킨다.
신 부회장은 아버지 못지 않은 '현장파'이기도 하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마다 롯데 매장을 찾아 '잠행'을 즐긴다. 지난 7일에는 롯데백화점 스타시티점을 혼자서 두 시간 가까이 돌아봤다.
지난 10월말 개점한 이 점포의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다. 특히 젊은 층이 주로 찾는 7~8층 스포츠 라운지와 매장을 꼼꼼히 확인하고는 "운동화 매장에선 제품에 기능별 특징을 표시하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한 계열사 대표는 "신 부회장보다 현장을 모르면 안 되니 더 자주 (현장에)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 부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는 '미스터 젠틀맨'.임직원들에게 질문할 때나 롯데호텔에서 웨이터에게 주문을 할 때도 꼬박꼬박 경어를 쓴다. 측근들은 '몸에 밴 겸손함'이라고 표현한다.
20년 가까이 신 부회장을 보좌해온 이인원 롯데그룹 정책본부 사장은 "임직원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편 치밀한 성품으로 대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룹 전체 임직원들은 그만큼 더 준비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전한다.
신 부회장은 40~50대 CEO(최고경영자)를 대거 발탁하며 '세대 교체'를 주도하는 등 롯데의 보수적인 기업문화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며 변화를 주도해 왔다.
"외부 간섭을 받기 싫다"며 롯데쇼핑 상장에 부정적이던 신 회장의 고집을 2~3년 간 끈질기게 설득으로 꺾은 것도 신 부회장이다. 아예 한 발 더 나가 런던 증시에도 동시 상장시켰다. 롯데가 내수기업에서 벗어나 글로벌 유통기업으로 나아가려면 해외 상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올해 최고 히트상품 중 하나로 꼽히는 프로야구단 롯데자이언츠 사례도 그의 과감한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그는 롯데자이언츠가 감독 선임을 놓고 갈팡질팡하던 지난해 10월,박진웅 사장을 불러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미국식 자율 야구 신봉자인 그는 일본 지바 롯데의 바비 밸런타인 감독으로부터 추천받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직접 면담해 롯데자이언츠 사령탑에 앉혔다. 롯데의 외국인 감독 영입은 학맥과 인맥을 무시할 수 없는 국내 프로야구계에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선 신 부회장이 지금껏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어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유통부문에서 그가 도입한 사업 중 '유통 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1위에 등극한 게 없다고 꼬집는다.
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로 신 부회장이 롯데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추진하는 해외사업과 금융업의 속도를 조절할 수 밖에 없는 점도 부담이다. 아버지 밑에서 오랜 기간 혹독한 경영 훈련을 받으며 '내공'을 쌓아온 신 부회장이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 갈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