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등반대 등산 첫날인 16일 임걸령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하고 연하천 대피소로 가는 길.고길연씨(44)는 어른 허리 높이의 배낭을 메고도 눈 덮인 산길을 뜀박질을 하듯 잰걸음으로 올랐다. "산토끼같다"고 하자 고등학교 때 마라톤을 했기 때문이라며 밝은 얼굴로 웃었다.

"우리가 신문에 나는 거요?" 고씨는 지리산 등반에 기자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그저 '내여집'(내일을 여는 집)에서 간혹 해오던 산행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고씨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겠냐"며 쑥쓰러워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해가 뉘엿해지자 발길을 다시 재촉했다.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아'하는 함성이 나왔다. 처음으로 맛본 성취감이었다.

그렇게 첫밤을 보내고 얼굴을 마주한 고씨는 "우리(재활인)가 생각한 것보다 얼굴이 밝지 않냐"며 친숙한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장터목 대피소로 올라가는 길.고씨는 앞서 가다가도 높은 바위 앞에서는 말없이 뒤로 손을 내밀어 주었다. 겹장갑을 하고도 따뜻한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천왕봉이 마주 보이는 장터목 대피소에 도달했을 때 그가 말을 걸어왔다. "이건 비밀인데,나중에 짐 풀면 사진 보여달라고 해요. "

저녁을 먹고 마주한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너댓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외손녀였다. 사진 한 장으로 이야기는 뜻밖에도 길게 이어졌다.

그는 대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주안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고3이던 19살 때 4살 연상인 누나의 친구와 일을 벌였다. 그때 생긴 아이가 지금의 큰 딸이다. 아이가 생겼다고 하자 더럭 겁이 났다.

군대로 도망을 갔지만 아이엄마가 부대로 면회를 왔다. 제대 후엔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 LG전자 서비스 센터에 취직을 했다. 아이엄마와 가정도 꾸리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15년을 근무하다 어머니가 일하는 시장에 가게를 차렸다. 닭집이었는데 10년간 소매업을 했다. 지금도 그 덕에 '닭'에 관한 것이라면 줄줄 꿴다.

시련이 닥쳐온 것은 지난해였다. 장사 이문이 좋아 도매업을 벌이기로 하고 양계장에 35만마리를 주문했다. 그때 조류독감(AI)이 터졌다. 주문한 닭들은 모두 폐사했다. 고스란히 모두 땅에 묻어야 했다. 하루아침에 사업 밑천을 모두 날리니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남양주에서 닭을 실은 트럭을 몰고 오다 반대편 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인사사고였다. 합의금을 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눈만 감으면 생각이 났다. 누군가 잡으러 올 것만 같았다. 술병으로 손이 간 건 그때부터였다. 가게 2층 구석방에서 날마다 소주 5병을 들이켰다. 그렇게 하길 5~6개월.체중은 85㎏으로 불어났다.

술을 끊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동생의 일 때문이었다. 출산 중이던 동생이 수혈을 받아야 했다. 급한 마음에 "내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수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과도한 음주로 간 수치가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단 마음을 먹고 일자리를 알아도 봤다. 경비자리가 있다고 해 이력서를 들고 갔더니 대졸 학력에 30대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는 좌절감이 또 밀려왔다. 술에 또 손이 갔지만 이걸 이기지 못하면 사람이 안 되겠다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다 '내여집'을 알게 됐다. 지난 4월 고씨는 그렇게 내여집 식구가 됐다.

고씨는 내여집에서 닭집 사장을 꿈꾸고 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나섰다. 전 가게 주인이 가게터를 내주기로 했고 닭을 대주겠단 업자들도 생겼다.

그는 "매대만 차릴 돈이 있으면 되는데 워낙 경기가 안 좋아 걱정"이라면서 "그래도 내년에 사업을 시작하면 도움받은 것들을 다 돌려줄 요량"이라고 했다. 고씨는 "바람처럼 산처럼 내마음도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