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 아이젠(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등산화에 덧씌우는 장비)을 힘겹게 박으며 생각했다. 외환위기 이후 11년만에 찾아온 경제위기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힘든 삶을 강요할까. 벌써 많은 가장들이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마주하고 있고,자영업자들은 폐업으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더욱이 사정이 빠른 시일내에 호전될 것 같지 않아 서민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누구보다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의 극빈곤층 5인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파산과 오랜 노숙생활로 심신은 지쳐있지만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재활의지를 다지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지리산 종주를 택한 것은 이 산이 갖고 있는 결연함과 끈끈한 생명력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산꾼들도 쉽게 나서지 못한다는 겨울 지리산 종주를 성공한다면 유례없는 경제위기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6명은 인천의 노숙자 재활쉼터인 '내일을 여는 집' 가족 6명(인솔 목사 1명 포함)과 함께 16일부터 18일까지 2박3일간 겨울 지리산 33.5㎞ 코스를 종주했다. 종주단의 이름은 '희망 등반대'로 지었다.

기자와 재활인으로 구성된 '희망 등반대'의 색했던 분위기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또 입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던 대피소의 잠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재활인들은 한 봉우리를 넘은 뒤 농담을 했고,그 다음 봉우리를 넘은 뒤에는 지나온 삶의 여정을 털어놨다. 시간이 갈수록 어깨와 다리는 무거워졌지만 마음의 무게는 각자가 덜어내고 있었다.

등반 둘쨋날 저녁에는 함께 모여앉아 마음속 이야기까지 주고 받았다. 천왕봉 정상 아래서 마지막 밤을 보낼 때는 모두가 잠을 설쳤다. 아이의 울부짖음처럼 밤새 대피소의 창을 들이치던 바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못내 고대하던 뭔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었다.

천왕봉 등정이 시작된 18일 새벽.이제 등반대는 험한 바윗길도,준봉의 칼바람 따위도 상관하지 않았다.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닭 도매상을 하다가 조류독감 파동에 파산한 고길연 씨(43)가 가슴 속의 결기를 토했다. "이젠 다시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저 바람처럼 자유롭게,저 봉우리처럼 흔들림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천왕봉의 일출은 찬란하고 눈부셨다. 지평선을 길고 붉게 물들이며 올라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대원들은 가슴에 쌓여있던 그간의 서러움과 울분들을 씻어냈다. 대신 그 자리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희망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집 주방장 생활을 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조성구 씨(38)는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내뱉었던 호흡이 모여 마침내 천왕봉에 도달했던 경험을 평생 기억하며 삶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지리산=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