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분위기도 아니고 시간도 없고…." 요즘 정부부처 국장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에게 "장관이 한번 모이자고 안 하십디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연말이 오면 부처마다 장관 주재로 수십명이 모여 폭탄주를 곁들인 송년 만찬을 갖는 게 상례였지만 올해 관가에서는 이런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엄습해온 경제위기에 새해 업무보고까지 앞당겨진 탓에 한 해의 수고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여유조차 없어진 것이다.

과천에서는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등의 부처가 예년같은 규모의 송년만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지경부는 지난 17일 국장급 이상 간부들의 만찬을 잡았다가 대통령 업무보고(26일) 일정이 확정되자 신년모임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업무보고를 앞두고 실무자들이 대부분 야근을 하는 상황에서 간부들만 따로 송년회를 갖는게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재정부도 아직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재정부 관계자는 "국장들은 빼고 장관과 1급 이상 몇 명만 모여 식사 한번 할 것 같은데 날짜는 안 잡혔다"고 전했다.

1급들이 사표를 낸 부처들은 송년 분위기가 완전히 실종돼 '모이자'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의든 타의든 사표를 받은 장관과 사표를 낸 1급들이 한 장소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양새가 어색하기 이를데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27일 업무보고를 앞둔 교육과학기술부는 아예 일정이 없고,농림수산식품부는 식사를 한번 하자는 얘기만 무성할 뿐 날짜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A부처의 한 국장은 "IMF때도 조촐하게나마 송년회를 가졌는데 올해는 도무지 그럴 만한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면서 "사표를 냈더라도 장관이 오라면 가기는 하겠지만 그 모임이 과연 즐겁게 진행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윗분들'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별,과별 송년회도 아예 취소해 버리거나 간단한 점심식사로 갈음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B부처의 한 국장은 "경제위기로 국민들이 고생하는 상황인 만큼 송년모임을 자제하는 게 공직자의 도리인 것 같다"면서도 "그래도 한번 정도는 장관이 직원들을 격려해 주는 자리가 필요한데…"라고 했다. 위기극복 대책 마련,업무보고,연말 인사 등을 앞둔 관가는 이래저래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류시훈 경제부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