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청혼의 벽' 앞에서 파키스탄 남편 감동 고백

"그동안 문화 차이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많은 사람 앞에서 약속할게.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잘 하겠다고.사랑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오후 8시 서울 청계천 두물다리 '청혼의 벽'.파키스탄 국적의 오바이드 칼립씨(30)가 부인인 김은선씨(39)에게 뒤늦은 프러포즈를 했다. 아직 익숙지 않은 한국말 프러포즈였지만 그동안의 고생과 사랑의 감정이 듬뿍 묻어 나왔다. 아내 은선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이를 보던 사람들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칼립씨는 "앞으로 더욱 행복하게 잘 살자"고 덧붙였고,은선씨는 "우리 자기,정말정말 사랑해.앞으로 사랑하면서 살자"고 화답했다. 순간 400인치 대형 스크린과 분수대에 비친 워터스크린에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나타났다. 비눗방울이 흩어지고 황홀한 조명이 연출되면서 문화와 나이 차이를 극복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다.

칼립씨는 외국인 노동자로 2001년 한국에 왔다. 이듬해 5월 만난 은선씨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칼립씨에게 한줄기 빛과 같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2002년 10월부터 사귀기 시작했고 6개월 만인 2003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동안 너무 바빴다. 매일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프러포즈는커녕 좋은 경험을 만들 여유조차 없었다. 이를 늘 아쉬워하던 은선씨가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공개적 프러포즈 이벤트를 신청했다.



칼립씨는 "다른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피했지만 은선씨만은 아무 편견 없이 대해줘 첫눈에 호감이 갔다"고 털어놨다. 이어 "은선씨가 첫사랑"이라며 "조만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당당한 대한민국 남자로 살아가겠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은선씨도 "문화와 9살 차이의 나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하고 "2세도 계획 중"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를 지켜보던 최말림씨(56)는 "우리 남편도 프러포즈를 해줬으면 좋겠다"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청혼의 벽 개장 1주년을 맞은 이날 청계천에는 칼립씨 부부 외에도 사랑을 고백하는 프러포즈가 이어졌다. 이날은 특별히 1주년 기념으로 지난 1년 동안 청혼의 벽에서 프러포즈한 청혼자들의 편집영상이 상영됐다. 마흔살이 넘어 결혼한 권영동씨(46)의 앙코르 프러포즈와 예비 신부에게 청혼을 하는 양성우씨 커플의 프러포즈도 이뤄졌다. 청혼의 벽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지난 1년 동안 119쌍의 커플이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했다. 이 중 현재까지 5쌍이 결혼에 골인했고 나머지 102쌍은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재철 기자 eesang6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