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퇴직금 운용

얼마 전 A은행에서 명예퇴직한 B씨(52)는 퇴직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억원을 받았으나 어떻게 운용해야할지 막막하다. 내년에는 경제위기의 삭풍이 올해보다 더 심하게 불어올 것이란 전망에 마음은 다급하기만하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가 있지만 따로 모아놓은 자금이 없어 '퇴직금=은퇴자금'일 수밖에 없다.

퇴직금은 일정 기간 직장에서 회사를 위해,또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는 과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아무런 계획 없이 쓰다 보면 퇴직금도 금세 바닥을 드러내게 되고 자녀의 결혼을 비롯해서 퇴직 이후에도 목돈을 들여야 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퇴직금도 전략을 갖고 적절하게 운용해 나가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없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퇴직금 운용의 첫 번째 원칙은 '퇴직금도 투자하라'는 것이다. 은행 예금에 넣어두고 이자를 받아가면서 조금씩 꺼내 쓰면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을 거라는 기대는 착각이다. 일반적으로 투자금 배분과 관련해 100에서 나이를 뺀 수만큼을 주식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라는 얘기가 있다. 나이가 50세라면 위험자산의 비중을 50% 정도로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이 같은 일반적인 원칙보다 다소 공격적으로 퇴직금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의료기술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수명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퇴직금도 그냥 묻어둬서는 안 되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계속 불려나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더구나 당분간 저금리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은행 예금에만 기댈 수는 없다.

공성률 국민은행 금융상담센터 재테크팀장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퇴직금으로 평생을 보장받으려면 물가상승률 이상의 수익은 꾸준히 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예금 외에 주식과 펀드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내야 한다고 해서 한 가지 상품에 목돈을 몰아넣는 '몰빵' 투자는 금물이다. 특히나 투자금이 퇴직금이라면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퇴직금의 운용 방법은 퇴직 당시의 나이와 재산 상태,앞으로의 재무계획 등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은행 등 금융권에서 진행된 희망퇴직을 보면 20~30대의 젊은 직원 중에도 상당수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많게는 1억~2억원의 퇴직금을 갖고 회사를 나오고 있다.

20~30대에 퇴직을 한 경우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직장을 얻거나 창업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퇴직금은 새 직장을 얻어 새로운 소득이 생길 때까지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새 직장을 얻기까지의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지 않는다면 퇴직금 운용을 통해 큰 돈을 벌어야 할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다. 실업 기간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6개월~1년치의 생활비를 6개월~1년 만기의 은행 정기예금에 넣어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자금 운용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은행 적금이나 적립식 펀드 불입은 잠시 중단하는 게 좋고 보험은 가급적 해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한경리 한경와우에셋 금융자산관리사(FP)는 "보험이 해지된 상태에서 만에 하나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면 다시 가입하기 어렵다"며 "최소한의 보장은 받을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퇴직금으로 대출금을 갚으려 한다면 그에 앞서 대출의 성격을 따져봐야 한다. 김창수 하나은행 재테크팀장은 "신용대출이라면 무조건 갚는 게 낫고 주택구입을 위한 대출이라면 조금 고민해봐야 한다"며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 생각이면 대출을 빨리 갚는 게 좋고 집을 팔고 더 비싼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 있다면 굳이 대출을 먼저 갚을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비해 50대 이후에 퇴직을 한 경우라면 재취업의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퇴직금 운용의 중요성도 커진다. 퇴직금만으로 여생을 꾸려가야 하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한 FP는 "퇴직 이후에는 우선 생활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먼저 공과금 식비 경조사비 등으로 지출 항목을 세부적으로 분석해 한 달 최대 생활비를 계산한 다음 3~4개월치 생활비는 비상 자금으로 별도의 통장에 예치해 두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남은 돈에 대해서는 당장 쓸 돈과 3~5년간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해 놓고 기다릴 수 있는 돈,5년 이후에 쓸 노후 생활비 등으로 돈에 '이름표'를 붙일 필요가 있다.

당장 또는 1년 이내에 필요한 돈이라면 정기예금이나 수시입출금식예금(MMDA) 등 가격 변동의 위험이 없는 안전자산에 넣어둬야 한다. 3개월 만기의 환매조건부채권(RP)도 단기 자금을 굴리기에 적합한 상품이다. 3~5년간 묵혀둘 수 있는 돈은 적립식 펀드를 비롯한 간접투자상품이나 주식에 투자해 일정 수준의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