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등반대'지리산 종주(下)] 조성구씨의 새 출발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꿈이 생겨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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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구씨(38ㆍ사진)는 지난 9월 인천에 있는 어느 아파트의 옥상 계단에서 하루 반나절을 울었다. 뛰어내리겠다는 결심으로 20층 아파트 꼭대기에 올라섰지만 결국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건물에서 내려와 거리를 정처없이 떠돌았고,10원도 없는 주머니 사정을 알면서도 무작정 술집에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돈이 없다는 그의 말에 가게 주인은 어이없어 했고,다행히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조씨는 등반 도중에도 내여집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는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 단 뒤쳐진 이가 있으면 조용히 그 사람이 올라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보드라운 속내를 드러낼 뿐이었다. 조씨는 등반 둘쨋날 세석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은 뒤 지난 봄 철쭉으로 가득했을 세석 평전을 바라보며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 했다.
사실 조씨가 희망등반대에 합류한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등반대는 실력있는 중국집 주방장 출신인 조씨 덕분에 지리산에서 최초로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주방에서 허드렛일부터 배운 조씨는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많은 월급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저축도 했고 동생들에게 용돈도 줬어요. 돈이 모자랄 때는 주방장이 갑자기 자리를 비운 다른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채웠고요. 예쁜 여자친구와 결혼도 약속했죠."
그러면서 점점 하고싶은 것도 사고싶은 것도 많아졌다. 때마침 DJ정부의 내수진작을 위한 신용카드정책이 조씨의 욕심과 맞아떨어졌다. 서명만 하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있는 재미가 솔솔했단다. 발급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는 모두 마련했고 나중에는 가족들 명의로도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나중엔 빚이 5000만원 가까이 되더라고요. 카드깡에서 돌려막기까지 안해본 것이 없어요. "
그러다 조씨는 빚이 버거워 가족들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으로 도망쳤다. 여자친구도 그를 떠났다. 먹고 살만한 기술이 있으니 굶지는 않았지만 쌓이는 스트레스로 술잔에 손대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재기하기 위해 가족과 화해도 해보고 홍성으로 돌아가 직접 중국집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 빚은 더욱 불었고 가족들도 연락하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집을 나서서 인천으로 왔어요. "
인천에서도 밤마다 술을 마셨다. 낮에 주방에서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피까지 토했다. 일할 수있는 기회는 점점 줄었고 돈도 궁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손을 벌리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조씨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며칠을 굶었고 무전취식을 시작했다. 파출소에도 여러번 불려갔다. 배가 고프니 감방에라도 넣어달라고도 했다. 한 경찰은 "그럼 죄를 지으라"고 했고,"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알아서 하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때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경찰 한분이 손에 1만원을 줬어요. 그리고는 구청에 가면 노숙자 쉼터를 소개해 줄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내여집으로 들어왔어요. "
조씨는 아직 내여집 생활을 시작한 지 두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이곳 생활이 좋다고 한다.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있다며 스스로를 용서할 수있게 됐다. 다행히 내여집에 들어오면서 고정적이진 않지만 종종 일할 수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생겼다.
"산을 오르면서 숨이 찰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뭘하고 살았나'는 생각이 들더군요. 꿈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자립해서 성실하게 살고싶다는 작은 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부끄러움이 많은 조씨는 등반 도중에도 내여집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는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 단 뒤쳐진 이가 있으면 조용히 그 사람이 올라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보드라운 속내를 드러낼 뿐이었다. 조씨는 등반 둘쨋날 세석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은 뒤 지난 봄 철쭉으로 가득했을 세석 평전을 바라보며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 했다.
사실 조씨가 희망등반대에 합류한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등반대는 실력있는 중국집 주방장 출신인 조씨 덕분에 지리산에서 최초로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주방에서 허드렛일부터 배운 조씨는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많은 월급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저축도 했고 동생들에게 용돈도 줬어요. 돈이 모자랄 때는 주방장이 갑자기 자리를 비운 다른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채웠고요. 예쁜 여자친구와 결혼도 약속했죠."
그러면서 점점 하고싶은 것도 사고싶은 것도 많아졌다. 때마침 DJ정부의 내수진작을 위한 신용카드정책이 조씨의 욕심과 맞아떨어졌다. 서명만 하면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있는 재미가 솔솔했단다. 발급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는 모두 마련했고 나중에는 가족들 명의로도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나중엔 빚이 5000만원 가까이 되더라고요. 카드깡에서 돌려막기까지 안해본 것이 없어요. "
그러다 조씨는 빚이 버거워 가족들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으로 도망쳤다. 여자친구도 그를 떠났다. 먹고 살만한 기술이 있으니 굶지는 않았지만 쌓이는 스트레스로 술잔에 손대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재기하기 위해 가족과 화해도 해보고 홍성으로 돌아가 직접 중국집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 빚은 더욱 불었고 가족들도 연락하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집을 나서서 인천으로 왔어요. "
인천에서도 밤마다 술을 마셨다. 낮에 주방에서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피까지 토했다. 일할 수있는 기회는 점점 줄었고 돈도 궁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손을 벌리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조씨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며칠을 굶었고 무전취식을 시작했다. 파출소에도 여러번 불려갔다. 배가 고프니 감방에라도 넣어달라고도 했다. 한 경찰은 "그럼 죄를 지으라"고 했고,"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알아서 하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때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경찰 한분이 손에 1만원을 줬어요. 그리고는 구청에 가면 노숙자 쉼터를 소개해 줄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내여집으로 들어왔어요. "
조씨는 아직 내여집 생활을 시작한 지 두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이곳 생활이 좋다고 한다.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있다며 스스로를 용서할 수있게 됐다. 다행히 내여집에 들어오면서 고정적이진 않지만 종종 일할 수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생겼다.
"산을 오르면서 숨이 찰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뭘하고 살았나'는 생각이 들더군요. 꿈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자립해서 성실하게 살고싶다는 작은 꿈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