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가 문제로 떠오른 올 봄까지만 해도 은행들은 "기업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은행들은 기업에 판매한 키코를 외국 은행 등 제3자에 넘겨 약간의 수수료만 챙겼을 뿐이고 환 변동에 따른 이익이나 위험은 기업이 떠안아야 할 몫이라는 입장이었다. 웬만한 손실도 기업이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폭탄은 액정표시장치(LCD) 전문기업인 태산LCD에서 터졌고 하나은행이 그 파편을 맞았다. 태산LCD는 작년 10월 국민 신한 하나 외환 산업은행 등 여러 은행과 3억7440만달러어치(당시 환율 기준 약 3500억원)의 키코 계약을 체결했다.

환율이 달러당 890~950원에 머물면 손실을 보지 않는 구조였다. 계약 금액은 태산LCD의 1년 전체 매출액(약 7000억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무리한 수준도 아니었다. 대부분 수출 기업들이 연 매출의 50~60% 정도를 환헤지하고 있었다.

원·달러 환율이 갑자기 뛰어 지난 3월 1000원을 넘어섰고 태산LCD는 3월 말 기준 390억원의 환손실을 입었다. 상반기 영업이익(115억원)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다급해진 태산LCD는 "환율 약정 구간을 조금 더 올리면 손실액을 만회할 수 있다"며 각 은행에 SOS를 요청했다.

대부분 은행들은 난색을 표했다. 추가로 계약을 하면 은행이 과도한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하나은행은 고심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환율 약정 구간을 980~1030원으로 올리는 피봇(PIVOT) 계약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피봇은 환율이 약정한 구간 안에 머물러 있으면 태산LCD가 이익을 보지만 그 구간을 벗어나면 큰 손실을 보게 되는 구조로 설계한 통화옵션 상품이다. 환율이 크게 올랐을 때뿐만 아니라 크게 내렸을 때도 손실을 보기 때문에 키코보다 위험한 파생상품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당시 대부분의 연구소들이 환율이 1050원 이상 오르지 않을 것으로 봤고 태산LCD 자체는 견실했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환율 변동의 위험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베팅을 한 것이다. 원·달러 환율은 9월 초 약정 구간을 순식간에 넘어섰고 11월에는 1500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태산LCD는 거액의 환차손으로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하나은행은 계약에 따라 대신 지급해야 할 의무가 생겼고 9월 말 기준으로 2507억원의 손실을 충당금으로 쌓아야 했다. 이 때문에 하나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3분기에 712억원의 적자를 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태산LCD의 과도한 욕심과 하나은행의 낙관적인 환율 전망이 빚어낸 패착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하나은행이 다른 은행들과 피봇 계약을 공동으로 떠안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해야 했고 사후관리를 좀 더 철저히 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하나은행은 환율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