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래 <부산교대 교수ㆍ교육학>

교수신문이 금년의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선정했다. '병이 있음에도 의사에게 진료를 꺼리는 것'을 가리키는 이 말은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지만 좋은 남의 충고를 싫어하는 행태를 비유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중요한 논점은 이 사자성어가 근거도 빈약한 좌파 '논리'(?)에 늘 밀리는 2008년의 대한민국을 설명했다는 데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중대한 사안을 놓고 하나하나 짚어가자면 좌파와 시끄러운 논쟁을 해야만 하고,그래서 당장 지내는 데 지장이 없는 일은 그냥 덮어두고 가자는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단초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열어놓았다. '이념의 시대는 끝내고 실용의 시대를 열자'는 주장 그 자체가 '호질기의'였다. 그 의중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대통령의 말은 모든 사람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안에서만 유효하다. 확고한 이념 설정 없이 실용은커녕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한 대통령의 국정은 초장부터 엇박자를 친 것이다.

그 서막이 무려 4개월간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야기된 촛불시위다. 시장 개방으로 실리를 취하고 부수적으로 야기되는 문제(피해농가보상)는 현실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대통령의 전략은 실용마저도 놓친 꼴이 되었다. 확고하게 다지고 넘어가야 할 이념문제가 대선의 압도적 지지에 의해 확인된 것으로 착각한 대통령의 '이념 없는 실용'은 '호질기의'의 결과이다.

대통령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7-4-7공약이건,국리민복(國利民福)이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기반이 튼튼해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일이었다. 확고한 이념이 없으니 방송사의 어이없는 오보(誤報)와 좌파의 선동에 1년 내내 나라가 온통 흔들린 것 아닌가.

많은 국민들이 이념 문제에 식상한 것이 사실이지만,그것은 좌파가 제기하는 시끄러운 이념 논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좌파가 불리하면 사용하는 말이 '새는 좌우날개로 난다'이다. 상호 호혜 원칙처럼 들리는 이 말은 좌파가 가장 지키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6년 전 미군 장갑차에 사망한 여중생 사건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으면,올해의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도 같은 비중으로 전국민이 궐기해야 할 일이다. 발생하지도 않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이 심각하다면,납이 포함된 중국산 게와 멜라민이 함유된 중국산 유제품 수입은 중국과 국교라도 단절할 만한 사건인 셈인데,좌파가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호질기의'의 교육판(版)은 누가 뭐래도 전교조의 학력평가 거부와 교원평가 반대이다. 그들의 행태는 질병치료와 건강증진에 따르는 고통이 싫어서 질병을 벗이라고 호도하고 의사의 진료행위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난 가을 서울교육청이 발표한 허울뿐인 '학교선택제'도 좌파와의 논쟁을 대충 무마하고 구색만 갖추고 넘어가려는 호질기의의 극치이다.

올해의 화두 '호질기의'는 대통령을 비롯한 통치세력이 견지해야 할 이념의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다시금 괴담(怪談)과 선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확고히 하고,아울러 왜 국민 다수가 좌파에 쉽게 쏠리는지를 늘 살펴볼 일이다. 좌파가 내놓는 제안들은 대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을 띠기 때문에,개인과 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자율과 책무성,경쟁과 같은 덕목들은 늘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수호에 노고(勞苦)가 따른다고 해서 이를 '호질기의' 삼아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