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잔 술과 한 그릇 국을 함께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살의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원로시인 김종길씨(82)의 시 <설날 아침에>는 발표된 지 4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애송시 목록에 드는 절창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마다 찬찬히 읽어 보면 늘 의미가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노시인은 지난해 위수술을 받은 데다 다리 신경통 탓에 산책을 하기도 버거울 정도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주로 서울 수유동 자택 서재에 머물면서 시나 산문을 쓰고,영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우리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새해에 책으로 내기 위해 한시의 격,우리의 멋이나 시의 존재론적 문제,미국 문학이 한국의 시와 비평에 끼친 영향 등을 다룬 논문들을 정리하는 것도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이다. 문학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한 '내가 만난 영미작가들'도 내년 1월에 책으로 엮는다. 한시를 짓는 모임인 '난사'에 참여해 한 달에 한두 편 정도 한시를 짓기도 한다.

노년에도 이토록 활발하게 활동하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저 시간을 충실히 보내는 것이 습성이 되어 버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창작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십니까.

"1992년에 정년퇴임하고 5~6년 전까지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는데,그 이후에는 학교에 나가지 않으니 시간이 꽤 있습니다. 그 덕에 많이 쓰는 셈이지요. 늘그막에 시쓰는 일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손끝으로 펜만 놀린다고 시가 나오는 게 아니고,긴장도 해야 하며 근력도 필요하니까요. 나이가 드니까 긴장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체력도 달리는 등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

▶청ㆍ장년 시절에는 연평균 2편 정도를 발표했을 정도로 과작(寡作)하셨지요. 오히려 노년에 더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하시는 듯합니다.

"1992년까지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로 있다 보니 강의 등 다른 할 일이 많아 시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가나 시인이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나 연구 등 학자로서 해야 하는 일을 가볍게 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지요. 재직 당시 교수로서는 본명(김치규)을 사용했는데,대학 제자들이 제 필명을 모를 정도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시인의 사후에 몇 편이나 살아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되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쓰고 적게 쓰고의 문제는 아니지요. 저는 시에만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경험한 일이나 생각했던 것을 청탁이 들어오면 시로 만들고는 했습니다. 올해 발표한 시집(《해거름 이삭줍기》 )에 수록된 <이것도 시랍시고>에서 말했듯이,시간 여유가 생긴 후 시를 더 많이 쓴 건 사실이지만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적습니다. "

▶경제 위기로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이 잘 안 되어 고민이 깊고,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곤경에 처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인데 너무 딱한 사람들이 많이 안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힘들더라도 양심에 어긋나게 살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희망을 잃지 말고 정도를 걸으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은 굶어 죽으면 죽었지 못할 짓은 안 하는 법인데,보통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곤경에 빠지면 죄를 짓기 쉽지요. 그래도 생계형 범죄는 동정도 가고 이해도 되지만,생계형 범죄를 저지를 형편이 아닌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건 없어졌으면 합니다. "

▶내년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새해를 어떻게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미가 매우 급해서 빨리 격해지는 편이지요. 새해에는 누구나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었으면 합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40대 남자가 이혼한 전처의 친정집에 난입해 총기를 난사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그와 같은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급한 성미를 가라앉히고 느긋하게 마음을 먹으면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본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본심을 지킨다는 것은 근원을 따지면 성선설에 기본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래 마음이란 착하고 순수하다는 전제 하에서 본심을 지키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을 품고 모든 이웃들을 너그럽고 따뜻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

▶사회 지도층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참 한심한 게 자리를 차지하면 비리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가지면 안될 것을 탐내면서 비리를 범하는 습성이 우리에겐 역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쁜 짓이 문화가 되다시피 했다고나 할까요. 이걸 좀 탈피했으면 좋겠지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얼마전부터 논란이 된 쌀직불금 문제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세태는 '아귀체제',즉 '아귀들의 노름판'이라고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는 시집이 많이 출간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시가 성한 나라이지요. 시집 팔리는 걸 보면 독자들도 많고,시집 출판도 하기 쉬워졌어요. 사실 시집이 많이 나오면 좋은 시가 나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월트 휘트만이 '위대한 시인이 나오자면 위대한 청중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우리나라 시 독자는 많은 편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줄여버리는 게 도서 구입 등 문화비라는 게 걸리긴 합니다. 그런데 활발한 시집 출간의 부작용도 있습니다. 많이 나오니까 좋은 시가 독자들의 눈에 띄기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

▶세계에 한국 문학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한국 문학이 외국에 꽤 많이 번역되고 출판되었지만 실제 호평을 받고 많이 읽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해요. 우리나라의 좋은 작품을 잘 번역해서 잘 출판해야 하는데,영국이나 미국 현지 출판사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한국 문학 강좌가 있는 곳에서 교재나 부교재로 쓰이는 것이 주된 판로니까요. 하지만 제가 1987년 우리나라 한시를 영역한 책은 호평을 받기도 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글=이고운/사진=정동헌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