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 실장 등 연주동호회

주한 대사들과 자선행사

감색 정장에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점잖은 신사들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흔히 생각하는 록 밴드 공연 연주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얌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면서 무대는 금세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어진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에 경제 불황으로 인해 우울한 송년의 풍경도 잠시 잊고 황홀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28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 대강당에서 펼쳐진 '송년 자선 음악회'는 대한민국의 현직 외교관들이 직접 기타,베이스,드럼,전자키보드를 연주하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공연이었다. 외교통상부의 오준 다자외교조약실장이 드럼을 맡고,인도지원과의 이소리 서기관과 대북정책협력과의 이은정 서기관이 보컬을,외교안보연구원의 류은진 서기관이 보컬과 베이스,박용민 북핵협상과장,이원우 서기관이 기타를 담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김일범 서기관도 드럼으로 참여하고 김성훈,박승원 서기관은 키보드를 맡았다.

이날 공연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문정왕후 역으로 열연했던 박정숙 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컴컴했던 무대가 조명으로 일순간 밝아지자 보컬을 맡은 이소리 서기관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머라이어 캐리의 '올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연주됐다. 평소 점잖은 외교관의 모습을 보여주던 이들이지만 이날만큼은 정열적인 음악가로 변신,관객들을 열광케 했다.

조지 마이클의 '키싱 어 풀(Kissing A Fool)',폴리스의 '에브리 브레스 유 테이크(Every Breath You Take)' 등 팝송뿐 아니라 럼블피시의 '예감 좋은 날'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이 이어졌다. 넬슨 예밀 차벤 주한 우루과이 대사와 피에르 클레망 뒤뷔송 주한 벨기에 대사가 게스트로 나와 각각 피아노와 바순 실력을 선보이자 미국에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준구 사범은 하모니카 연주로 분위기를 띄웠다.

이번 자선 음악회를 주도한 오준 실장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74학번으로 벌써 5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 대사가 인정한 프로 수준의 '드러머'다. 대학 때 드럼 스틱을 잡았으니 드러머 경력도 30년이 넘는다. 자선 음악회의 또 다른 주역인 박용민 과장은 기타,베이스,키보드 등 밴드에 필요한 웬만한 악기는 다 다룰 줄 아는 '만능 뮤지션'이다.

오 실장과 박 과장이 2004년 의기투합해 결성한 '외교부 연주동호회'(MOFAT Musicians)에는 10여명의 현직 외교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외교'와 '자선'을 키워드로 2005년부터 매년 말 자선 공연을 해오고 있다.

오 실장은 "취미 삼아 음악을 하는 것이라면 굳이 외교관들이 나서서 공연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해 외교 행사로 하되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는 자선행사로 하자는 두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자선 음악회에는 라바 하디드 주한 알제리 대사를 비롯해 주한 외교사절단과 외교부 관계자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신각수 외교부 차관과 박원순 변호사가 축사를 했다. 모금한 1200여만원(추정)은 전액 자선단체를 통해 불우이웃을 위해 쓰인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