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자금 가뭄' 우려 … 채권 차환마저 쉽지 않을듯

선진국의 국채 발행이 내년에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면서 신흥국의 자금조달 여건이 크게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내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의 차환마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29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내년 선진국들의 국채 발행액은 무려 3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올해보다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키로 결정한 선진국들은 재원 마련을 위해 너도나도 국채 발행을 늘리는 추세다. 닉 차미 RBS 캐피털 마켓 신흥시장분석 책임자는 "내년엔 제한된 자본을 놓고 발행자 간 싸움이 치열해질 것"이라며 "신흥국 정부나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의 경우 차입은 가능하겠지만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 높은 금리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ING에 따르면 신흥국 정부와 기업들은 내년에 채권과 대출,이자지급,무역금융 등을 포함해 총 6조8650억달러에 이르는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데이비드 스피겔 ING 신흥시장 전략담당 책임자는 "신흥시장 국가나 기업은 내년에 차환(리파이낸싱) 리스크가 최대 문제가 될 것"이라며 "국가부도 가능성은 낮아보이지만 많은 기업들이 부채를 조정해야 하거나 채무불이행 상태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브릭스의 경우 내년에 채무 상환이나 차환 부담이 △브라질 2050억달러 △러시아 6050억달러 △인도 2570억달러 △중국 2조4370억달러에 이른다. 그래도 이들 국가는 외환보유액이 넉넉해 채권 발행이 여의치 않을 경우 보유 외환에 의존할 여지가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도 내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가 640억달러와 360억달러에 달한다. 헝가리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엔 이미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상태다.

선진국들이 내년에 이처럼 막대한 국채를 발행할 움직임을 보이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내 은행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미국 등이 언제 어느 정도의 규모로 국채를 발행할지 등에 대해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며 "선진국 국채가 대거 발행되기 이전에 가급적이면 외화표시채권을 발행해야 할 것으로 보고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은은 선진국들이 2분기께부터 본격적으로 국채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외화표시 산금채를 내년 초께 발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규모는 10억~20억달러 정도를 검토 중이다.

수출입은행 역시 같은 차원에서 내년 초 채권 발행에 나서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이 은행은 이달 초부터 투자은행들과 접촉해 달러표시채권의 인수 여부를 타진하고 있으며 가능하다면 내년 1월 중 채권 발행을 마무리하길 기대하고 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자본시장과 채권시장의 유동성이 말라가면서 아시아 기업들이 기존 주주를 대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주주 우선배정 방식 유상증자(주주할당 발행)를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주할당 발행은 기존 주주들에게 보유 주식에 비례해 신주를 인수토록 하는 방식으로,서방국가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된다. 주주할당 발행은 주로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단기간에 자금을 조달하는 증자방식과 달리 통상 몇 주간 시간이 걸린다.

월지는 이미 주주할당 발행이 늘고 있으며 많은 기업들이 이를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은 이번 달 26억4000만달러를 주주할당 발행 방식으로 확보했으며,싱가포르 최대 은행인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은 지난 22일 26억달러 규모의 주주할당 발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임스 플래밍 UBS 아시아 신디케이트 담당 헤드는 "현 시장 상황에선 아시아 기업들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자금 조달을 하기 어려워 최후의 보루로 주주할당 발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고객 신뢰도 회복을 위해 현금을 확충하려는 욕구가 강한 한국의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주주할당 발행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성완/박준동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