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공간에 실린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

"퇴근길 창밖을 보면 아파트 불빛이 수도 없죠.저 불빛 중 내 가족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왜 없을까라는 생각에 답답합니다. 내년에는 아니 내후년에라도 초등학생 아들 녀석 공부방이라도 마련해 줄 수 있다면…."

늦은 밤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는 그는 지쳐보였다. 서울역 인근 프린터기기 총판업체에서 일한다는 김모씨(41).조촐한 송년모임에서 마신 소주 한 병 때문이었을까. 낯선이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털어놨다.

우리 시대의 평범한 40대 가장이 견뎌내야 했던 치열한 삶은 묵직한 울림을 줬다. 고된 삶이지만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그에게 어설픈 위로의 한마디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경기도 문산으로 가는 김씨의 귀가길은 그렇게 애환과 희망이 교차했다.

2008년의 마지막 금요일인 지난 26일,야간택시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노가다'를 결국 직업으로 택한 어느 경제학도에서부터 사업실패로 집을 날린 뒤 만회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가장에 이르기까지 힘겨웠던 지난 1년간의 삶의 흔적들.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새해에는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동진콜택시 소속의 8년차 영업택시 기사인 송왕근씨(50)의 택시에 오른 것은 오후 6시30분께였다. 첫 손님은 인천에 사는 주부 정모씨(51).요즘 어떠시냐는 인사말에 푸념부터 늘어놓는다. "어렵죠.남편 벌이도 시원찮고 돈 많아서 택시타는 게 아니라 짐은 많은데 날은 춥고 위치는 어딘지 모르겠고 해서 큰 맘먹고 탔어요. 인천에서 오는 길인데 택시비 최대한 아끼려고 교대까지 지하철 갈아타고 와서 강남구청까지만 가려는 거예요. 내년에는 경기가 좀 좋아졌으면 좋겠네요. "

퇴근길 정체로 길이 막히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기본요금 거리라 생각했는데 3500원이 나왔다. 주머니를 뒤져 잔돈까지 털어낸 정씨가 내리자 송씨가 한마디 한다. "요즘에는 장거리 가시는 분이 흔치 않아요. 다들 어려운지 기본요금 거리에 4명이 함께 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장거리를 가더라도 4명이 같이 탄 뒤 각자 목적지에서 내리고 계산은 맨 마지막 사람이 하는 경우도 늘었죠."

강남구청에서 압구정으로 향하는 길에 한 젊은 여성 승객이 택시를 불러세운다. 올해 고등학교에 기간제 영어교사로 취직한 박모씨(27).생일파티 겸 송년회를 위해 압구정으로 간다는 그녀는 잠시 친구와 통화를 한 뒤 머뭇거리며 송씨에게 부탁을 했다. "죄송한데요. 가는 길에 친구 한 명 더 태우고 갈 수 있을까요. "


퇴근 시간이 지난 8시께가 되자 거리에 빈 택시들이 늘어섰다. 강북으로 넘어갔지만 신세계 백화점 앞,롯데 백화점 앞,을지로 입구역,종로 등 어딜가나 빈 택시 행렬이다. 강북의 주요 거리를 빙빙 돈 지 한 시간여째.후암동에서 드디어 손님을 만났다.

남영역으로 가자는 50대 남자 손님은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는지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5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기본요금 1900원이 아닌 1800원만 건네고 내렸다. 더 내야된다고 붙잡는 송씨에게 그는 "기자 양반이 앞에 탔으니 합승이잖아.그것 때문에 내가 불편했던 만큼 덜 내겠다"며 화를 냈다.

그가 떠난 뒤 미안해하는 기자에게 송씨는 괜찮다며 말을 건넸다. "저런 술취한 사람들을 택시기사들은 '골뱅이'라고 불러요. 택시는 운수업(運輸業)이 아니라 운에 좌우되는 운수업(運數業)이라고들 하죠.'골뱅이'가 걸린 날은 그냥 운이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

오후 10시가 넘어가자 다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강남역 인근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젊은 청년을 태웠다. 내년이면 31세가 된다는 김모씨.3년 전 서울에 있는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지금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 졸업할 때는 금융계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러나 졸업 한 뒤 취직이 잘 안되던 차에 토익,토플 학원비나 벌자는 생각으로 '노가다'를 시작했죠.근데 어느새 2년이 지나고 그게 직업이 됐네요. 같이 일하는 형들이 '배운 게 도둑질이라 넌 다른일 못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맞는 말이에요. 제 주위 동료들도 다 4년제 대학 나오고 꿈 많았던 친구들이지요. 지금 꿈이 있다면 건설 관련 자격증을 따 이 바닥에서 성공하는거죠.일당이 6만원 정도되는데 내년에 자격증 따면 좀 괜찮아지겠죠."

점심에 송년회 다과를 하고 아쉬워 친구와 한 잔했다는 그는 토요일도 쉬지 않기 때문에 어떤 술자리라도 10시쯤 끝낸다고 했다.

그는 "경기침체다 뭐다 말이 많은데 내년에는 우리나라도 좀 '으샤으샤'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한다"는 소망을 남겼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택시는 더 바빠졌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태우고 무악재,연신내,홍대 등으로 승객을 날랐다.

새벽 1시 가까운 시각 서울역 앞에서 경기도 문산까지 가자는 프린터총판업체 직원 김씨가 이날의 마지막 손님.매일 아침 5시50분 기차를 타고 출근하지만 이날은 일을 그만둔다는 후배를 위한 송년모임 차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내 집 한 칸 있었으면 한다는 그의 소망을 들으며 자유로를 달리고 돌아오니 어느덧 새벽 2시30분.송씨의 6334번 택시는 2008년을 힘겹게 보낸 이들의 퇴근길을 그렇게 함께 했다.

부산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시인 지운경은 택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세상에는 시보다 더 감동적인 시가 있네… 삶이 온 몸으로 쓰는 시는 정말 멋있네"라고 노래했다. 온 몸으로 시를 쓰는 서민들이 편안할 수 있는 2009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