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논설위원 bklee@hankyung.com

마키노 노보루 전 미쓰비시종합연구소 소장이 '제조업은 영원하다'는 책을 통해 제조업이야말로 경제의 기둥이라고 강조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1987년의 일본경제 통계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까닭이다. 그 해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351조엔이었지만 토지와 주가 상승액은 476조엔에 달했다. 전화나 하고 도장이나 찍으면 되는 재테크로 부풀린 자산이 1억2000만 국민이 1년간 땀흘려 일한 생산액보다도 훨씬 컸던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일은 없다는 판단 아래 그는 거품경제에 대한 경고를 내놓았고 실제 일본경제는 그 이후 급격한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에 빠져들었다.

미국경제가 지금 유례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도 마키노씨가 당시 일본경제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것과 다를 게 없다. 제조업 등 실물경제의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금융기법으로 거품을 부풀리며 돈놀이를 즐겼던 탓이다. 게다가 국채발행 등으로 다른 나라의 돈까지 무더기로 끌어들여 부풀린 거품이기에 후유증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제조업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동북아시아의 저력은 새롭게 다가온다. 한·중·일 3국이야말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첨단산업부터 경공업까지 거의 모든 제조업이 존재하고,그것도 강력한 경쟁력을 자랑한다. 자동차 조선 반도체 기계 등 웬만한 분야의 세계 최고는 바로 동북아 3국이다. 물론 한·중·일 역시 지금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경제가 정상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돈놀이에만 눈이 팔렸던 나라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거품이 적어 위기 극복 시기도 빠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외환보유액도 2조달러에 이르는 만큼 앞으로 세계경제의 판도 변화를 선도할 것이란 관측이 적지가 않다. 실제 엔화와 위안화 가치는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오름세를 타고 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 전문가들도 머지않아 아시아 국가들이 큰 세력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동북아 지역이 얼마나 빠른 시일내에,얼마나 큰 파워로 성장할 지는 한·중·일이 과연 적극적 정책공조를 펼칠 수 있느냐 여부에 좌우될 공산이 크다. 3국이 한 목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세계정치 무대에서의 발언권은 크게 높아질 것이고 경제적 영향력 또한 배가될 게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말 첫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이를 정례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

하지만 3국간 협력이 원만히 이뤄질 수 있을지는 낙관을 불허한다. 3국은 경제발전 단계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과거사 문제와 영토 분쟁도 내재돼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하다. 혹시라도 상대국에 주도권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말 양국과 체결한 통화스와프 규모가 달러화로 환산할 경우 똑같이 300억달러 씩으로 결정된 것이 이들의 주도권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한국의 역할이다. 중·일간 주도권 다툼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며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입지를 적극 활용해 양국의 민감한 이해를 적절히 조정하며 3국간 공조를 펼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아나가야 한다. 특히 금융공조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3국간 교역에서 역내 통화의 결제 비율을 늘리고 유사시 금융시장 변화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게 바람직하다. 그리되면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함은 물론 동북아 지역의 독자 세력화를 꾀할 여지도 한층 커진다. 한국이 보다 높은 국제적 위상을 확보케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