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어물쩍 내놓는 '얌체공시'는 올해도 여전했다. 증시 폐장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덜 한 틈을 타 악재성 공시를 대거 쏟아내는 현상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투자자로서는 그만큼 연말에 더욱 꼼꼼히 공시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연말 악재성 공시의 대표적인 사례는 기존에 체결한 계약을 취소하는 경우다.

단성일렉트론은 31일 공시를 통해 미국 파크DCS사(社)와 작년 10월 체결한 400만달러(약 52억원) 규모의 공급계약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파크DCS가 매출채무 지급을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계약 유지가 힘들다는 공문을 보내왔다고 단성일렉트로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단성일렉트론은 당초 파크DCS에 HD IP(고화질 인터넷)TV 평판 패널과 셋톱박스를 납품하기로 했지만, 기간 연장 등 수차례 계약조건을 변경하다가 결국 계약 취소 사실을 이날 알렸다.

할리스이앤티는 불과 3개월 전에 결정한 사업을 취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할리스이앤티는 지난 9월 공장ㆍ창고임대ㆍ농축수산물 사업 등을 하는 씨엔로지스 지분 100%를 81억원에 취득하기로 했으나, 중도금 납부일을 단 하루 앞둔 30일 돌연 사업진행을 포기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할리스이앤티측은 "주식시장 상황이 악화돼 자금조달을 위해 계획했던 유상증자의 규모가 축소됐고, 이로 인해 사업 진행이 불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에스피코프는 올해 초 유비트론과 체결한 태양에너지 사업의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MOU)를 해지한다고 공시했다. 에스피코프측은 "하이드록스 가스 사업부문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하고자 양해각서를 해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에스피코프는 이와 함께 운영자금 180억원 마련을 위한 일반공모 방식의 유상증자를 결의했다고 밝혔다. 발행 예정 신주(3600만주)가 기존 발행주식총수(2068만여주)를 넘어서는 대규모 증자여서, 예정대로 증자가 진행된다면 주식가치 희석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엘앤에프는 레이젠과 함께 홍콩 합작법인을 세운다는 계획을 취소했다. 이 회사는 당초 300만달러를 들여 LG디스플레이 모듈공장 납품용 TV 백라이트유닛(BLU) 생산공장을 짓기로 했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보고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모빌링크 코코엔터프라이즈 케이티피유 등도 납품계약을 해지하는 내용의 공시를 30일과 31일에 각각 쏟아냈다.

사업이 지연되거나 불투명해진 기업들도 연말을 이용해 관련 사실을 밝혔다.

휴바이론은 콩고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구리 관련사업을 하기로 했다고 지난 6월 밝혔으나, 이 사업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고 31일 공시했다. 구리가격의 시세가 최근 급락한데다 콩고에서 내전이 심화되고 있어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큐렉소는 2006년 미국의 바이오업체 3곳과 특허권 양수도계약을 맺고 관련 제품을 판매했지만 예상보다 매출이 저조했다고 알렸고, 샤인시스템은 2006년 9월 일본 회사와 맺은 납품계약과 관련해 상대방이 단가 인하를 요구해와 계약을 종결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계열사 지원도 연말에 빠지지 않는 공시 가운데 하나이다.

보루네오가구는 계열사 보루네오엘앤에스에 시설투자금 19억원을 대여해주기로 했고, 티에이치엔도 계열사 제이에스엔에 43억원을 1년간 빌려주기로 31일 결정했다.

카엘은 계열사 카엘젬백스에 빌려준 원금과 이자 33억원을 당초 31일에 받기로 했다가 2009년말로 연기해줬다. 또 기존 대여금에 더해 3억원을 추가로 빌려줬다.

이밖에 에프아이투어는 유상증자 철회와 대표이사 변경 등 회사의 중요 경영사항을 담은 8건의 공시를 집중적으로 연말에 내놓았고, 제강홀딩스와 씨티엘은 적자 회사를 100억원대에 인수하는 내용의 타법인 지분취득 공시를 각각 31일 발표했다.

이상윤 동양종금증권 연구원은 "연말연휴를 이용해 악재성 얌체공시를 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 "투자자들도 연말이 되면 더욱 꼼꼼하게 공시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경닷컴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