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 소설가 >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예술가 스님께서 노년에 약간의 치매현상이 왔을 때,밥상 위에 특별한 반찬이 올라오면,당신 밥그릇에 그것을 가져가 통째로 들이붓는 걸 몇 번 목도한 일이 있다. 행여 남이 먹을까봐 처음부터 아예 '내 차지'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막둥이로 태어난 내겐 늘 어머니의 젖이 부족했다. 신산한 인생을 살아오느라 몸이 피폐해져 어머니의 젖은 그때 이미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될 때까지 젖을 빨았지만 그래서 나는 한번도 어머니의 젖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

1970~80년대,나는 매달 거의 300장 이상의 소설을 썼다. 며칠씩 책상에서 떠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이라고 불렀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본능에 따른 '소나기밥먹기'였다. 어느 신새벽,내가 죽어라고 쓰고 또 쓰는 행위 뒤에서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빈젖'이 나를 쫓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나는 오래 숨죽여 울었다.

뼈저린 경험에 의해 생의 DNA가 돼버리고 만 어떤 결핍이나 상처들은 때로 놀라운 에너지의 자장(磁場)이 된다. 우리가 유례없이 빠른 성장을 거듭해온 에너지원(源)도 알고 보면 '못먹고 자란 세대'의 결핍과 상처에 그 연원이 있다. 그 세대의 가난에 대한 '앙갚음'의 부산물이 오늘날 우리가 가진 부(富)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러나 결핍과 상처는 두 얼굴을 갖는다. 에너지의 자장이며 동시에 자기 압제(壓制)의 사슬이 된다는 것이다. 그 결핍과 상처에 의해 죽을 때까지 내몰리다 보면,그는 이미 배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배부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본원적으로 불안하고 부자유한 존재로 남는다. 그는 더,더,더라고 외치면서 내달리므로 남이 보기에 성공했을 뿐,결코 행복과 충만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완벽주의자에 가까워서 무엇보다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과오나 실수조차 자신에 대한 혹독한 채찍으로 삼아 더 완벽하게 내달릴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삶은 부자유하다.

더 이상 정치적인 억압이나 개인의 생에 대한 명령권자가 없는 세상에서,자유인으로 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오늘 날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됐다. 우리에겐 그런 점에서 두 가지 위험한 억압구조만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바,우리가 숨겨 가진 결핍과 상처들이고,다른 하나는 세계 자본주의가 끝없이 우리를 본성 밖으로 내모는 경쟁주의적 욕망이다. 이 두 개의 위험한 억압구조는 물론 강력하게 맞물려 있다.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다'라고 일찍이 선언한 것은 철학자 칸트이다. 이 말에 따르면 자유롭게 살지 않는 한 '인간'이 아니며,더구나 '행복한 인간'은 될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유는 D H 로렌스의 말처럼 '첫째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나 자신의 '결핍'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내게 묻는다. 너는 자유로운가. 혹시 세계가 주입해놓은 바,가짜 자유를 진짜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짜로 자유로운 자는 '결핍'과 '욕망'에 의해 억압당해 있는 본성을 해방시켜 제 참주인으로 삼고 사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실수나 세상의 과오를 받아들이기 위한 전 단계로 자신의 과오나 실수에도 너그럽다.

내가 경쟁에서 뒤떨어진 것,내가 남에게 손해본 것,내가 사랑과 슬픔과 분노를 섣불리 남에게 들킨 것 등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고선 내가 남과 세상을 용서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참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당신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