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에 도장만 찍는 거죠.한마디로 악역을 맡는 겁니다. "8일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채권금융기관 조정위원회를 두고 금융권에서 벌써부터 뒷말이 많다. 위원회에 떨어진 첫 번째 임무는 건설사와 조선업체 중 퇴출 대상을 선별하는 일이지만 채점기준표는 금융당국의 지시로 이미 작성된 상태다. 금융감독원은 건설사 92곳과 조선사 19곳 중 구조조정 대상을 확정해 23일까지 보고하라고 마감시간까지 정해줬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담당자는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200곳이 넘는 기업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면서 "조정위원회가 퇴출대상을 직접 고른다고 믿을 순진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멋쩍게 웃었다. 김병주 위원장(서강대 명예교수)은 일단 시한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위원들의 선정과정도 석연찮기는 마찬가지다. 은행연합회 등 민간 협회에서 위원을 선정,7명의 위원이 호선방식으로 위원장을 뽑게 돼 있지만 실제로는 금융당국이 내정해 통보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위원 중 한 명은 사의를 표명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위원장 선정도 만만치 않았다. 적격자 후보도 많지 않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내정한 인물을 민간이 자발적으로 선정한 듯한 모양새를 갖춘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누군가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내세우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솔직히 민간주도의 구조조정이 가능하다고 보느냐"면서 "그렇다고 관료들이 전면에 나설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고충을 토로했다.

당장 퇴출기업의 주주 등 이해 당사자들이 제기하는 소송조차 감당하기 버겁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당시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각 은행장으로부터 백지위임장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금융당국이 언제까지 '구두 지시'를 통해 구조조정을 배후조정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굳이 공무원에 대한 민형사상의 면책조항까지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