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자이자 원로시인인 김종길 시인은 <황무지>를 쓴 시인 T S 엘리엇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가 고려대 영문학과에 다닐 때 <황무지>를 국내에 번역 · 소개했기 때문이다.

1961년 김 시인은 윌리엄 엠프슨 영국 셰필드대학 교수의 소개로 당시 정치가 처칠,사상가 버트런드 러셀과 더불어 영국 문화계의 최고 원로였던 엘리엇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73세였던 엘리엇은 '노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윤기가 흐르는 중년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김 시인은 엘리엇의 첫인상을 이렇게 평했다.

"그의 신체적 첫 인상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준수하다'는 것이 될 성 싶다. 그런데 그 '준수함'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훤칠하게 잘생겼다'는 뜻의 준수함이 아니라 훤칠하면서도 날카롭고 유능해 보이는 준수함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씨는 느릿느릿하면서도 어휘나 구문의 선택이 범상치 않았다. 그것은 마치 화법도 시작(詩作)처럼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것인 듯했다. "

김 시인이 엘리엇,로버트 로웰,윌리엄 엠프슨,스티브 스펜더,게리 스나이더 등 영 · 미 작가 31명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담은 《내가 만난 영미 작가들》(서정시학)을 펴냈다.

문학 월간지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내용을 묶은 이 책에는 31명의 사진과 친필 편지 등이 함께 수록돼 있다. 작가들의 인상이나 그들을 만나서 겪었던 일,그들의 문학세계에 대한 생각 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최고의 현역 시인이면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문화계의 대표 격이었던 미국 시인 로버트 로웰을 만났던 이야기도 소개했다.

1969년 로웰은 을씨년스러운 방으로 김 시인을 데려가 커다란 눈으로 한참 동안 뚫어지게 노려보듯 하더니 "지금 한국에서의 생활 형편은 어떠합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시작된 대화는 김 시인이 로웰과 친분이 있는 엘리엇을 만나본 경험과 엠프슨 교수와의 인연을 털어놓으면서 전환을 맞았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로웰은 유리잔에 얼음과 위스키를 채워 왔고,원래 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은 거의 두 시간이 가깝도록 계속돼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헤어졌다.

이 책에 실린 시인 31명 중 16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김 시인은 서문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든 아직 살아 있든,이들 영 · 미 작가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