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율 <경기대 교수ㆍ경제학>

유동성 확대에도 실물침체 지속, BIS 유연적용등 미세조정 필요

작년 9월15일 리먼브러더스 파산보호 신청 사태가 촉발한 글로벌신용경색이 조금은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금융시장 신용경색의 정도를 나타내는 TED스프레드(미국 국채 수익률과 리보의 금리 차이)는 지난해 9월 중순 고점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직접 20억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는 데 성공하면서 국내 금융회사의 외화유동성 위기도 한 고비를 넘은 듯 보인다. 국내 은행의 원화유동성 위기도 그동안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와 직접 자금공급확대에 힘입어 크게 완화됐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이제 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에는 아직 미덥지 못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미국에서 1월 말부터 있을 실적 발표를 앞두고 금융회사들의 부실이 크게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시장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미국 증시가 며칠간 하락했고 원 · 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다시금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재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달러는 유로에 비해 강세를 나타내고 있고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가속화되면서 엔화는 모든 통화에 대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환율 움직임은 리먼브러더스 파산보호 신청이 발표되기 직전인 지난 8월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에 매우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국내금융시장 상황은 더 답답하다. 그동안 공급이 확대된 유동성이 자금을 필요로 하는 실물부문으로 흘러들어가기보다는 MMF 등 대기성 상품에 머무르고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했지만 대출금리 인하는 그만큼 속도를 내고 있지 못하다. 채권발행이나 기업어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여전히 위축돼 있다. 이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실물경기침체가 예상되는 가운데 신용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믿음이 약화되고 옥석구분이 잘 안되니 돈 빌려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은행의 자본적정성,즉 BIS비율과 관련된다. 향후 경기침체로 연체비율이 높아지는 등 이유로 BIS비율의 하락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은행들이 신용 확대에 소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신용공급 위축은 경기침체를 가속화하면서 궁극적으로 은행의 부실을 다시 확대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그동안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은행의 BIS비율 제고 독려,신용보증 공급의 확대,채권안정기금의 조성,구조조정의 추진 등 정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다. 오히려 일부 정책은 사태 해결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이 BIS비율 12% 및 기본자본비율 9%를 맞추도록 지도한 결과 은행은 오히려 대출을 축소하고 고금리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자금조달비용을 높이게 됐다. 이는 최근 정책금리 인하와 CD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역마진 우려로 인해 은행이 과감하게 대출금리를 낮추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BIS비율을 높이도록 하는 조치는 금융시장 상황이 좋은 때에 해야 할 일이지 이미 신용경색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추진되는 것은 시기상 적절하지 않다. 이때에는 정부가 BIS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하면서 은행의 자본확충을 도와주는 게 맞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금융감독원장의 BIS기준 완화 발언은 적절한 것으로 보이며,자본확충펀드도 신속하게 조성돼 은행에 투입돼야 한다.

거대한 쓰나미가 지나가긴 했지만 망원경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국내 신용경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 정책수단이 지니는 인센티브 구조와 효과에 대해 현미경을 보듯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늘어난 유동성이 한가하게 MMF에서 낮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