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업황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투자심리가 위축돼 돈을 빌려주려 해도 빌려가는 우량 기업이 없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기업들의 설비투자용 자금 수요가 줄어 은행들이 자금 운용에 애를 먹고 있다. 은행권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계획을 지난해보다 대폭 늘리고 금융감독원도 중소기업 대출을 늘릴 것을 은행에 독려하고 있지만 실제 중기 대출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 외환 등 6개 시중은행의 중기 대출 잔액은 지난 22일 기준 303조5320억원으로 지난해 말에 비해 1조4007억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지난해 1월 한 달간의 중기 대출 증가액 7조8000억원보다 6조원 이상 적을 뿐만 아니라 금감원이 1월 중 중기 대출 순증액 목표로 제시한 4조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설을 앞두고 협력업체에 대한 결제성 자금 등 '설 자금'으로만 9조원을 지원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대출된 돈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설을 앞둔 10일(영업일 기준) 동안 은행을 통해 시중에 공급한 돈은 3조2000억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34.1%나 줄었다.

은행들은 지난해 4분기 제조업 생산이 전 분기 대비 12% 감소해 설비투자 자금 수요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건설 · 조선사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기업 부실이 점차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에까지 대출을 적극 확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도 중기 대출 부진의 원인이다.

권용대 기업은행 여신기획부 팀장은 "본점 차원에서 중기 대출을 늘리라고 지시해도 일선 창구에서는 기업의 신용도나 부실 위험에 대해 보다 냉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은행의 중기 대출 연체율은 1.7%로 1년 만에 0.7%포인트 급등했고 연체금액도 7조2000억원으로 전년 말 3조7000억원의 2배 규모로 늘어났다.

은행들이 지난 연말 자금 지원을 늘려 새해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많지 않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기업들이 현금 보유를 늘리기 위해 지난해 말 한도 대출을 많이 받아갔다"며 "이달 들어서는 이를 상환하고 있는 업체들이 많다"고 밝혔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