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글로벌화
동시통역 가능한 '잉글리시남' 부사장급 3분의2 외국인으로 교체

남다른 운동신경
배구선수 출신…골프는 '핸디캡5' 耳順에도 관악산 1시간만에 등정


"부회장님 어디 계신지 빨리 파악해봐.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LG전자 해외법인들은 남용 부회장의 출장 때마다 홍역을 치른다. 법인장을 비롯한 현지 직원들에게 일정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 부회장은 공항에서 내린 뒤 제일 먼저 매장을 방문한다. LG 브랜드가 붙은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의 집을 찾아 어떤 점이 부족한지를 묻는 것이 두 번째 일정이다. 법인에 연락이 들어오는 것은 현지에 도착한 뒤 최소 6~7시간이 지난 이후다.

남 부회장은 출국 한 달 전부터 일부 본사 직원과 컨설팅 회사를 이용해 어떤 매장에 들를지를 결정한다. 고객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방문하는 가정집도 외부 업체에 맡긴다. 현지 법인이 사전에 '공작'을 못하게 해야 고객과 시장의 반응을 냉철하게 살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책상머리의 보고 서류보다는 자신의 눈과 귀를 더 믿는,실전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 부회장이 현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피가 바짝바짝 마릅니다. LG가 선전하고 있는 매장과 우호적인 고객들을 만났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는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 해외에서 근무하다 최근 귀국한 한 LG전자 간부는 해외법인에서 남 부회장을 '암행어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2007년 3월 CEO(최고경영자)로 선임된 남 부회장은 파격적인 경영 방식으로 재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고객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욕구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인사이트(insight) 마케팅'은 남 부회장의 전매특허로 꼽힌다. 파파라치처럼 추수감사절 기간 내내 북미지역 주요 거점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고객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했다는 일화 때문에 '커스터머 파파라치(customer paparazzi)'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고객을 중시하는 그의 경영 스타일은 경영회의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회의의 첫 순서는 LG전자 상담원과 고객의 통화 내용을 경청하는 것.2~3분짜리 상담 5~7개를 연속으로 들은 뒤 제품이나 서비스의 문제점,해결 방안 등을 논의한다. 고객과의 통화를 통해 자신이 맡은 부서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드러난 임원들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얼굴을 들지 못한다.

주요 보직 임원들을 외국인으로 교체하고 사내 주요 회의에서 영어만 사용하라고 지시할 만큼 글로벌화를 강조하는 것도 다른 기업 CEO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남 부회장의 영어실력은 '잉글리시 남'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탁월하다. 1989년 구자경 전 LG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할 때는 동시통역을 맡기도 했다.

그의 업무 스타일은 '실사구시' 네 글자로 요약된다. 지난해 LG전자의 한 임원은 파워포인트를 활용,관련 업계의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남 부회장에게 가져갔다. 내심 칭찬을 기대했던 이 임원에게 돌아온 것은 '쓴 소리' 뿐이었다. 남 부회장은 "불필요한 데이터를 모으는데 힘을 낭비하는 것은 조직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취임 첫해인 2007년 LG전자의 영업이익을 전년 대비 46.2% 끌어올리며 자신의 경영 방식이 효율적임을 증명했다. 지난해에도 사상 최대 수준인 49조원의 매출과 2조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특히 지난 4분기에는 삼성전자,소니 등 주요 경쟁업체들이 줄줄이 영업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업계에서 유일하게 흑자 성적표를 냈다.

지인들은 남 부회장을 '인화'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LG그룹 CEO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다국적 최고경영진'을 갖춰야 한다는 명목으로 부사장급 이상 경영진의 3분의 2 를 외국인으로 물갈이 한 것은 그의 경영 스타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대기업 특유의 순혈주의도 과감히 없앴다. 주요 사업본부의 마케팅 총괄 임원 자리를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외국계 기업 출신으로 교체한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 부회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임직원들도 적지 않다. 승진 자리가 줄어들면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영어 공용화와 강도 높은 낭비 제거 운동 등으로 업무 환경이 각박해진 것도 임직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남 부회장의 해법은 '대화'였다. 취임 후 1년여간 임직원들과 200여회의 '열린 대화' 자리를 마련해 주요 사업장과 연구소,해외법인 직원들에게 이런 의사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남 부회장은 등산과 골프 등 스포츠를 즐긴다. 학창시절 배구 선수로 활약,기초체력과 운동신경이 남다르다는 것이 지인들의 설명이다. 등산은 직원들과 많이 다닌다. 인사와 조직개편안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달에는 국내 마케팅을 담당하는 한국지역본부 임직원들과 관악산을 찾았다.

그의 등산 실력은 60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다. 관악산은 1시간이면 정상에 오른다. 산을 타면서 땀을 흘리지 않아 '불한당(不汗黨)'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골프도 재계에서 손꼽히는 고수다. 핸디캡 5의 싱글 골퍼로 300야드 이상의 드라이버를 자랑하는 장타자다. 2006년 5월 곤지암CC에서 '알바트로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인맥도 넓은 편이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이상철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석채 KT 사장 등과 막역하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