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극서부에 카일라스라는 산이 있다. 라사에서 무려 일주일이나 길 없는 길로 달려가야 간신히 닿는 성산이다. 이 산은 부처가 산다는 수미산이라 알려져 있고 흔히 지구의 중심,우주의 배꼽이라고 불린다. 몇 년 전 이 산을 순례한 적이 있다. 만년 빙하가 쌓인 산의 정수리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순례코스는 50여㎞로 보통 2박3일 걸린다. 순례코스 중 가장 고통스러운 구간은 해발 4900m에서 5630m의 해탈고개에 이르는 돌밭구간이다. 이 구간은 우리가 어찌어찌하다 인생에서 만나기도 하는 가장 힘든 시기의 고통과 많이 닮아 있다. 누구나 숨이 턱턱 막히고 한걸음 한걸음이 멧돌을 지고 가는 것처럼 무겁다. 그래서 이 구간이 끝나는 마지막 5630m 정수리를 '해탈고개'라고 부른다. 부처가 말한 바,'고통은 카르마(業)를 쓸어내는 커다란 빗자루'이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선 누구나 말소리를 내지 않는다. 몸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주변의 기이한 풍경에 압도당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올라가면서 옷가지를 벗어 돌에 걸어놓기도 하고 머리나 손톱 등을 잘라놓기도 하며 신발 장신구 따위를 벗어두기도 한다. 순롓길 좌우 산의 턱밑까지 옷가지와 신발과 잘린 머리 등이 끝없이 놓여 있다. 풍설에 썩어가는 옷가지들 위에 다른 순례객이 또 옷을 벗어놓고 가기도 한다.

그것들은 그냥 옷이 아니라 염원이다. 어떤 것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말하고,또 어떤 벗어놓은 신발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외친다. '죽지 않게 해주세요,죄짓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갈망의 외침이 온 산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들은 자기를 참으로 버렸다기보다 세속의 욕망과 다른 차원의 염원을 오히려 더 강렬하게 드러내는 표상이 된다. 불교에선 사람이 가진 탐욕(貪)과 성냄(嗔)과 어리석음(痴)을 삼독(三毒)이라 한다. 이 세 가지의 독이 집착과 망집을 낳는다. 해탈까진 아니라도,삶이 안정되고 너그러워지려면 최소한 이 삼독으로부터 자기를 지켜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독에 의해 자기 자신이 먼저 망가지기 때문이다.

삶은 유한하다. 제 아무리 출세하고 돈을 번다 해도 최종적으로 이것의 덫에서 빠져나갈 방도는 없다. 과실의 중심에 씨가 있듯이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중심에 죽음이 있고,세월이 가면서 죽음의 씨앗이 자라고 우거져 마침내 우리를 통째로 잡아먹어 버린다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백년을 산다 해도 영겁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사람은 본능에서 짐승의 층위에 있지만 그 영혼의 갈망으로 보면 신의 영역에 닿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과 달리 불가능한 꿈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종교를 통해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요,수양을 통해 고품격의 삶에 이르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다. 예인들의 최종적인 꿈도 물론 불멸이다. 동서고금에 남겨진 위대한 문화유산은 모두 인간의 불멸에 대한 지향과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세계는 지금 제3의 전쟁에 돌입해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주입하는 세속적인 욕망의 룰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계의 한켠을 본 것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입된 욕망을 따라 아우성치며 달려갈 때 다른 한켠에서는 세속의 안락과 욕망을 기꺼이 포기해서라도 불멸의 꿈을 갖고 그길을 좇아 품격 높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에겐 안락한 현세를 누리고 싶은 꿈도 있고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는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추구하는 꿈도 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 것인가는 오로지 본인의 선택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두 갈래 길이 지금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