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췄다. 4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피치는 이날 외환보유액 감소와 유가 하락 등을 반영해 러시아 외화표시채권 등급을 기존의 'BBB+'에서 'BBB'로 한 단계 강등했다. 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유지했다. 향후 추가로 낮출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피치가 러시아 신용등급을 낮춘 것은 러시아가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던 1998년 이후 처음이다.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36루블을 넘으며 지난해 정점 대비 50%나 추락했다. 정부가 더 이상 하락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마지노선(달러당 36루블)이 깨졌다. 러시아는 지난해 8월 이후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의 3분의 1이 넘는 2100억달러를 소진했다. 이 기간 중 외국인 투자자들은 2900억달러를 러시아에서 회수해 나갔다. 이처럼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5일 러시아 은행들에 대한 4000억루블(약 110억달러) 지원을 승인했다. 푸틴 총리는 앞서 2000억루블 지원이 은행들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구제금융은 은행을 통해 소비자와 기업 등 실물 분야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금융 불안과 통화가치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4대 주요 은행 중 BTA뱅크와 얼라이언스뱅크 등 2개를 국유화하기로 한 카자흐스탄은 이날 텡게화 가치를 18% 낮추는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옛 소련권 국가들과 함께 신속대응군을 창설하기로 하는 등 지역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등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7개 회원국 정상들은 이날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회의를 열고 신속대응군 창설 합의문 초안에 서명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