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건의 보험 가입,8건의 사고,그리고 7억2500만원의 보험금 수령.연쇄살인 피의자 강호순의 1998년 이후 보험 관련 기록이다.

강이 보험금으로 에쿠스 자동차를 몰고 9억원 상당의 재산을 소유하는 등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강은 어떻게 경찰 수사와 보험사들의 조사망을 뚫고 이 같은 거액의 보험금을 타 낼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이 같은 보험사기가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액은 한 해 2조원을 넘고,이것이 한 가구당 14만원 이상의 보험료를 더 내야 하는 결과로 돌아오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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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순 재산은 총 9억원


◆ 보험사기 어떻게 가능했을까

보험업계에 따르면 강은 1998년 덤프트럭 화재에 이어 2000년 티코 전복 사고,2005년 부인과 장모가 화재로 숨진 사건까지 8건의 사고를 통해 모두 7억2500만원의 보험금을 탔다. 이 중 각종 화재로 받은 보험금만 5억6000만원에 달한다. 주로 화재사고를 통해 보험금을 탔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처갓집에 난 화재로 처와 장모가 사망한 사고다. 강은 화재보험,생명보험 등으로 모두 4억8000만원을 수령했다. 당시 강은 보험에 가입한 지 채 한 달도 안 돼 사고가 났고,비슷한 보험을 여러 곳에 중복 가입한 데다 수입이 별로 없으면서도 한 달에 100만원 이상의 보험료를 내는 등 보험사기 혐의가 농후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과 보험사가 보험사기 혐의를 첩보,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6개월간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혐의를 입증하지 못해 보험금이 고스란히 나갔다.

손보협회 관계자는 "화재사고는 불을 끄는 과정에서 방화의 증거가 대부분 훼손되는 데다 전소가 되면 증거를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험사는 따로 수사권이 없어 경찰에서 혐의를 찾지 못하면 보험금을 줄 수밖에 없다.

강은 또 비슷한 보험에 수십 건을 중복가입해 한 사고로 몇 배로 보상받는 '보험 쇼핑'을 했다.

일례로 2000년 티코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전복돼 13개 보험사에서 5100만원의 보험금을 받았다. 차값의 10배 가까운 돈을 받은 것.특히 대부분의 보험 상품은 사고 1~2개월 전 가입했다. 2005년 처갓집 화재도 마찬가지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강호순은 2005년 처갓집에 불이 나기 직전 안양시에 있는 안양타워 빌딩 내의 보험사 7~8곳을 모두 돌며 보험에 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강이 보험에 집중적으로 가입했던 2006년 이전엔 보험업계 전산망이 공유되지 않아 이른바 비슷한 보험에 중복가입해 보상을 몇 배로 받는 '보험 쇼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이후 생명보험사들은 생보업계 계약정보 통합조회시스템을 구축했다. 현재 동일인이 3개월 이내 3건 이상 가입,보장 금액 합계 5억원 초과 등에 해당되거나 수입에 비해 많은 보험료를 낼 경우 계약을 거절하고 있다. 손보업계는 아직 중복가입 조회 시스템이 없다. 손보협회 관계자는 "손보사 상품은 대부분 중복가입을 해도 한 개 사고에 대해 실제손해액만 보상해주는 실손형"이라며 "다만 장기보험 중 정액형 상품이 일부 있어 중복조회 시스템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상법 개정을 통해 가입자가 같은 종류의 보험에 2건 이상 가입하고 계약 당시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보험범죄 정부차원서 대응해야

금감원에 따르면 연간 보험사기 추정액은 2조2300억원(2006년)에 달한다. 보험사기가 늘어날 경우 보험사는 보험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보험사기로 가구당 매년 보험료를 14만원 정도 더 내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보험범죄는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보험사기 적발액은 2006년 1780억원에서 2007년 2044억원,2008년 2410억원(추정치)으로 증가했다. 이병우 금감원 조사분석팀장은 "지난해 보험사기액수는 전년 대비 18% 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며 "올해는 불황 탓에 보험사기가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는 생계형 보험사기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험사기가 늘고 있지만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험사는 아무런 수사권한이 없다. 자체 조사팀은 단지 혐의가 짙은 사고에 대해 기초 증거자료 수집 · 분석 등을 통해 경찰 등 수사기관 업무를 지원할 뿐이다.

이 때문에 정부 차원의 보험범죄 수사조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양두석 손보협회 상무는 "미국 영국 등은 보험사기를 중대한 사회문제로 보고 수사 전담조직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의 보험범죄 수사 전담부서나 대응협의체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엔 보험사기방지국이 있고,미국은 주 별로 수사권까지 있는 보험사기국(IFB)이 설치돼 있다.

현재로선 금감원 보험조사실이 거의 유일한 정부 차원의 대응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감원은 2001년 보험조사실을 신설하고 2004년부터 보험사기인지시스템을 가동해 동일한 상품에 여러 개 가입한 뒤 보험료를 받아낸 보험사기 혐의자 기록을 경찰 등에 넘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금감원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행정조사권만 있으며 그 권한도 한계가 있다. 건강보험공단 등 정부기관과의 정보 공유도 제대로 안된다. 그러다보니 2007년 자동차 관련 보험사기로 신고된 8204건 중 혐의를 입증한 사건은 344건에 불과했다.

보험사기 혐의를 적발할 수 있는 전 보험권 통합시스템을 만들고,데이터베이스 등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보험 관련 계약 내용이나 보험금 지급 내역을 조회해서 보험사기 징후를 잡아낼 수 있지만 현재는 관련 자료가 생보협회,손보협회와 보험개발원,금융감독원 등 여러 곳에 분산돼 있어 통합적으로 볼 수 없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