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恥)을 아는 자는 강하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인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태평양전쟁 직전인 1941년 1월 일본 육군장관 도조 히데키(후일 전시내각 총리)가 제정한 군인수칙 '전진훈(戰陣訓)'의 한 구절이다. 바꿔 말하면 항복을 금지하고 옥쇄(玉碎)하라는 명령이었다. 전황이 기울면서 사이판에서, 이오지마에서 일본군은 칼을 빼든 지휘관과 총도 없는 병사들이 '반자이(萬歲)'를 외치며 무모한 죽음을 향해 내달렸다. 미군들은 이를 보고 들소떼의 돌진을 연상했다고 한다.

맨몸 돌격은 이윽고 의식적인 자폭공격으로 발전했다. 이른바 병기를 동원한 특별공격, 즉 특공(特攻)이다. 1944년 10월 제로센 전투기 5대가 미군 항공모함에 격돌, 침몰시키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자 일본군 수뇌부는 의기양양했다. 다양한 자폭특공부대가 창설됐다. 항공특공인 신푸(神風, 별명은 가미카제) 외에 인간어뢰 가이텐(回天), 폭탄보트 신요(震洋), 글라이더부대 오우카(櫻花) 등이 만들어졌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전함 야마토(大和)의 초대형 특공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발틱함대를 격파한 신화에 도취한 일본해군은 진주만 기습 직전 길이 263m, 만재배수량 7만2000t의 세계 최대 전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의 뚜껑을 열어보니 항공모함의 기동작전이 대세였고, 야마토 식의 거함거포(巨艦巨砲)는 한물간 시대의 퇴물임이 입증됐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당초 "장식품으로나 쓰일 것을 왜 만드나"며 힐난했다는 일화가 있다. 과연 장식품이었지만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지휘관급 함상식사로는 프랑스 풀코스 요리가 나와 '야마토호텔'이라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벤치히터 신세였던 야마토에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은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한 1945년 4월이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전투기를 유인해 내기 위한 미끼 역할이 작전 목표였다. 누가 봐도 자살 행위였지만, 명령은 이런 식으로 하달됐다.

도요다 해군사령관 : 황국의 흥폐, 바로 이 일거에 달려 있다.

구사카 해군참모장 : 1억특공의 선봉이 돼달라.

이토 야마토함대사령관 : 우리가 죽을 장소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알라.

연료는 오키나와까지 편도분만 채웠고, 전투기 공중엄호도 없었다. 순양함 1척, 구축함 8척을 거느린 전함 야마토는 출항 이튿날 1시간반 동안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규슈 서남 앞바다에 침몰했다. 낮게 깔린 먹구름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물어뜯는 수백대의 미군기 앞에 야마토는 바다에 버려진 고철덩이였다. 승무원 3009명 중 276명만 구조되고 나머지는 수장됐다.

야마토의 모항이었던 히로시마현 구레(吳)시 상공회의소가 350m 수심에 잠든 선체를 인양하기로 하고 오는 4월부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주포탑 등 선체 일부를 전시하고 전쟁의 참상을 알린다는 취지라는데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전함 야마토는 일본에서 '제국의 영광'을 부추기는 아이콘으로 부활한 지 오래다.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물리치는 '우주전함 야마토'로 배역을 살짝 바꾼 TV만화시리즈를 비롯해 장난감과 게임,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도 적지 않은 마니아가 생겼다.

일본인의 반전(反戰) 논리는 때로 상처받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말자는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할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들은 물에서 건져낸 일그러진 영광을 쳐다보며 야스쿠니에 이어 히로시마에 제국해군의 욱일승천기를 휘날리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