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필요 있나요" 공개도 많아…공사 잘 구분하면 업무에 도움
자주 만나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고 있으면 더하다. 결혼 적령기의 싱글 남녀가 같은 일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잦은 야근을 하다보면 말할 것도 없다. 때론 동일한 상사를 안주삼아 술자리를 갖고,비슷한 처지의 서로를 격려하다 보면 눈이 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사내커플'이다. 평범한 직장동료,선후배가 애정 관계로 한 단계 진화되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면 족하다. 그렇지만 사내연애가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자칫하면 사내 구설수에 휘말린다. 이를 피하려면 곡예같은 줄타기를 해야 한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문제다. 월급이며,상대방의 사내평가며,연애전력 등 모르는 게 없다. 신비감이 쉽게 사라질 수 있다. 만일 사내연애에 실패하는 경우 후유증은 심하다. 이후에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게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사내연애는 다른 연애보다 더 달콤한 반면 쌉싸름하다는 거다.
◆사내연애 제1법칙은 '비밀유지'
LG화학 IR팀에 근무하는 김정현 과장(34).그는 결혼 6년차의 커리어우먼이다. 남편은 같은 회사 옆 부서에서 일하는 재무회계팀 과장.나이는 남편이 네 살 많다. 그렇지만 입사가 빠른 김 과장이 엄연한 회사 선배다. 두 사람은 2002년 사내 교육과정에서 서로 눈이 맞았다. 교육과정은 고작 1주일.그렇지만 백년해로의 연을 만들기엔 결코 짧지 않았다. 교육이 끝난 뒤 스릴넘치는 1년여의 사내연애가 시작됐다. 이들이 가장 신경썼던 건 비밀유지.행여 구설수에 오르면 연애가 실패할까 우려해서였다.
그러다보니 퇴근 후 데이트는 007작전과 비슷했다. 근무시간 남몰래 주고받는 사랑의 눈빛,사무실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눴던 비밀스런 스킨십은 짜릿 그 자체였다. 결혼을 두 달 앞두고 동료들에게 연애사실을 고백했을 때까지 주변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결정했던 순간 김 과장에게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 업무연관성이 큰 부서에서 일하는 만큼 둘 중 한 명은 부서이동 등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였다. 이 커플의 업무능력을 인정한 회사는 어떤 인사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김 과장은 사내연애를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사내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감추는 게 능사는 아니야
최근 들어선 사내 연애를 금기시하던 기업들의 풍조도 달라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젊은층 사이에선 동료들에게 아예 연애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작년 연말 회사 동기와 결혼한 S보험사의 김모 주임(30)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내연애는 막판까지 감추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에 사정이 달라졌다"며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만나 사귀기로 한 커플들이 '우리 사귄다'고 공표하는 게 최근 분위기"라고 전했다.
2006년 일진그룹 사내 인트라넷에는 공개 프로포즈의 글이 떴다. 같은 계열사에 근무하는 사내커플이 연애 초기 동료들에게 연애사실을 알린 것.이 사내커플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해당 계열사 사장은 결혼 직전 인트라넷 게시판에 직접 '축하한다'는 글까지 남겼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요즘 사내연애를 하는 신세대 사원들은 연애사실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 것 같다"며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한다면야 이 같은 공개 연애가 업무효율 측면에서 더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너무 잘 아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
사내 연애의 장점은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수 있다는 점이다. 시간을 갖고 상대방을 지켜볼 수 있다. 그러니 연애 때 난무하는 감언이설이나 과대포장에 속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상대방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면서 과연 평생을 함께할 배필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김정현 LG화학 과장은 "대인관계 등 회사 업무과정에만 알 수 있는 상대방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는 등 상대방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사내연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는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사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가감없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비슷한 업무라도 할라치면 오히려 안 보면 나을 것을 봐야 해 상당한 스트레스라는 게 사내커플들의 전언이다. 그러다보니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으로 커플이 깨지기도 한다.
◆실패의 끝은 쓰다
쿨(cool)한 연애가 요즘 신세대들의 사랑 트렌드이긴 하다. 그렇지만 실패한 사내연애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크다. 사내연애가 깨지면 손해는 주로 여성 몫이다. 사내연애를 비밀로 하려는 여성이 적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귀다 헤어지면 계속 같은 직장에 있는 한 과거 연인의 소식을 들어야 하는 아픔도 크다. 설사 연애 당사자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척 해도 주변 동료들의 시선과 수근거림은 참기 힘든 불편함이다.
A은행 인사팀 관계자는 "사내연애의 실패는 당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폭풍우 뒤 폐허나 마찬가지"라며 "대부분의 경우 둘 중 한 사람이 퇴사하거나 관계사로 이직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오피스 스파우즈'와 '사내커플'의 사이
최근 직장에서는 성별이 다른 동료와 이성적 감정 없이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커플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배우자만큼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해서 '오피스 스파우즈'(office spouse · 회사 내 배우자)라고 불린다. 여성은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 남성은 '오피스 허즈번드'(office husband)'라고 일컬어진다. 이들이 사내커플과 다른 점은 이성적인 면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다만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고민 등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사이다.
최근 오피스 스파우즈는 증가하는 추세다. 온라인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20~3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3명이 오피스 스파우즈가 있다고 대답했다. 오피스 스파우즈가 사내커플과 다른 것은 이성적인 감정이 개입하느냐 여부다. 그렇지만 결혼적령기의 남녀가 만날 경우 오피스 스파우즈가 사내커플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