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2시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부근 성인오락실.낮 시간인데도 오락실 안은 '팡팡이'라는 신종 오락 게임에 빠진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 게임기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든다. "참나 도대체 저기서만 오늘 몇 번째 터지는 거야."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돈을 딴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오늘만 100배짜리가 다섯 번이나 터져 50만원 넘게 땄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안 터지는 날에는 시간당 5만4000원 꼴로 잃는다고 했다. 올해 대학졸업 예정인 김미정씨(24 · 가명)는 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경륜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2년 전 남자친구와 함께 경륜장에 왔다가 중독된 것.김씨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지만 경륜장과의 인연은 끊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두 경륜으로 탕진했지만 후회는 그 때뿐 경륜 생각에 목요일 저녁 때만 되면 가슴이 뛴다"며 "취업난에 머리가 아플 때마다 이곳을 찾다 보니 어느 새 중독이 됐지만 이대로 살게 될까봐 두렵다"고 털어놨다.

'바다이야기'를 능가하는 도박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2006년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잠시 잠잠해졌던 사행성 게임 바람이 다시 불고 있는 것.게다가 최악의 경기 상황까지 겹치면서 성인오락실,카지노 등 도박장들은 고등학생부터 실직자에 이르기까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실제 국내의 대표적 카지노업체인 강원랜드가 1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방문객 수는 291만명으로 2006년 179만명보다 100만명 이상 늘었다. 성인오락실 수도 2005년 말 1만4000여개에서 지난해 3만5600여개로 늘어 '불황 속 호황'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난해 차단한 인터넷 도박사이트 수도 4359개로 2003년 65건에 비해 8배가량 급증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 한 오락실 업주는 "경찰이 파악하지 못한 불법 오락실까지 더하면 훨씬 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박 열풍은 최악의 경제 위기에 편승해 강하게 불고 있다. 호프집 사장에서 직원으로 전락한 박경호씨(33 · 가명)가 대표적인 예.박씨는 지난해 운영하던 호프집의 매상이 하루 50만원에서 20만원대로 뚝 떨어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성인오락실에 발을 들였다. 도박 빚에 몰린 박씨는 결국 가게를 팔고 지금은 다른 술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공익근무 요원인 이진구씨(28 · 가명)의 어머니는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말리러 갔다가 도박에 빠진 케이스.10년 전 실직한 아버지는 이후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잃었고 최근에는 빚까지 내 강원랜드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참다 못한 이씨의 어머니가 남편을 찾아 나섰지만 어머니마저 도박에 빠졌다. 이씨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은 날,아버지가 돈을 땄던 모양"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도박 열풍이 불면서 카지노 주변에는 속칭 '앵벌이'로 불리는 신종 직업도 생겨났다. 이들은 카지노 측이 매일 휴대폰 ARS로 보낸 자리 번호표를 고객에게 판다. 자리 잡을 확률이 높은 500번 이하의 순번표는 30만~40만원,후순위인 1000번 이하는 10만~20만원 선이다. 원주 출신의 한 앵벌이는 "처음엔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최근에는 도박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아르바이트로 합세해 앵벌이 숫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기 불황에 따른 심리적인 불안감을 도박이 아닌 다른 대처법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강원대 심리학과 이인혜 교수는 "현실이 암담하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몰두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게 되는데 이때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도박"이라며 "도박 외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민제/이기주/김일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