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 스스로 낮은자리 내려온 큰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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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에도 "고맙다"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 별인 고 김수환 추기경은 의료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셨다.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왔던 고인의 철학과 종교관이 그대로 묻어난 말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
언제나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향한 고인의 사랑은 그래서 울림이 컸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노도처럼 뒤덮었을 때 김 추기경은 누구보다 강력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일련의 시국 사건에서 그는 성탄 · 사순 메시지나 강연,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1987년 6 · 10 민주항쟁 때에는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될 뻔한 위기도 이런 믿음으로 막아냈다. ☞ [화보] 김수환 추기경 선종…생전 모습
☞ [화보] 故김수환 추기경 유리관 안치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그 뒤에 신부들,수녀들이 있을 것이오.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 추기경은 지난해 촛불집회로 어지러운 난국에서도 "서로 화내고 있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며 "웃으면서 대화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정부 당국자에게 조언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 김보현(요한)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광산김씨 일파의 후손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워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김 추기경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탓인지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장사꾼이 되려는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聖召)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부모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넷째 아들 동환과 막내아들 수환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모친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동환과 수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던 수환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
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일반 상업학교인 갑조(甲組)와 소신학교 과정인 을조(乙組)로 나누어 운영됐는데 김 추기경은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전 전주교구장 김재덕(1920-1988) 주교 등과 함께 을조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가 순순히 사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를 부려보기도 하고,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는 죄같지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이른바 '세심병(細心病)'을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신부를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되기 싫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꾸지람만 듣고 방에서 내쫓긴 적도 있었다. 더욱이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까지 했다. 교장 선생은 버릇이 없다며 김수환 학생의 뺨을 때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했던지 그가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선생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청년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1944년에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은 변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모한 탈출을 감행하다 미수로 그친 적이 있지만 김수환은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장차 한국 천주교회의 버팀목이자 시대의 거목이 될 한 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이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김 추기경은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주교였던 1968년 2월 9일.노동자들의 인권을 찾아주기 위해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했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은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추기경이란 신분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한국 천주교회 2세기 만의 경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됐고,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언제나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향한 고인의 사랑은 그래서 울림이 컸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노도처럼 뒤덮었을 때 김 추기경은 누구보다 강력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일련의 시국 사건에서 그는 성탄 · 사순 메시지나 강연,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1987년 6 · 10 민주항쟁 때에는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될 뻔한 위기도 이런 믿음으로 막아냈다. ☞ [화보] 김수환 추기경 선종…생전 모습
☞ [화보] 故김수환 추기경 유리관 안치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그 뒤에 신부들,수녀들이 있을 것이오.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 추기경은 지난해 촛불집회로 어지러운 난국에서도 "서로 화내고 있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며 "웃으면서 대화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정부 당국자에게 조언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 김보현(요한)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광산김씨 일파의 후손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워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김 추기경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탓인지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장사꾼이 되려는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聖召)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부모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넷째 아들 동환과 막내아들 수환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모친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동환과 수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던 수환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
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일반 상업학교인 갑조(甲組)와 소신학교 과정인 을조(乙組)로 나누어 운영됐는데 김 추기경은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전 전주교구장 김재덕(1920-1988) 주교 등과 함께 을조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가 순순히 사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를 부려보기도 하고,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는 죄같지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이른바 '세심병(細心病)'을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신부를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되기 싫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꾸지람만 듣고 방에서 내쫓긴 적도 있었다. 더욱이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까지 했다. 교장 선생은 버릇이 없다며 김수환 학생의 뺨을 때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했던지 그가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선생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청년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1944년에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은 변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모한 탈출을 감행하다 미수로 그친 적이 있지만 김수환은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장차 한국 천주교회의 버팀목이자 시대의 거목이 될 한 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이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김 추기경은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주교였던 1968년 2월 9일.노동자들의 인권을 찾아주기 위해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했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은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추기경이란 신분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한국 천주교회 2세기 만의 경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됐고,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