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미르 라비치는 2차대전 때 폴란드 기병장교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스파이 누명으로 소련군에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시베리아 오지의 수용소에 감금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탈출,장장 7000㎞를 1년 이상 걸어 인도주둔 영국군부대로 들어갔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처참한 탈출기는 '얼어붙은 눈물'(원제 The Long Walk)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시베리아숲과 고비사막,히말라야 산악을 그는 걸어서 넘었다. 걷기가 자유를 향한 집념을 이룬 열쇠였던 셈이다.

'나는 걷는다'라는 책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언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이스탄불에서 시안(西安)까지 1만2000㎞를 걸었다. 60대 나이에 1099일간 육체적인 한계점이 반복될 정도로 걷고 또 걸은 대기록이 이 책이다. 자기 스스로 옛 실크로드를 택한 올리비에에게 걷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이자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방편이었다.

두 발로 걷기야말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직립보행하는 인간'(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이 처음 나타난 게 150만년 전이라 하니 제대로된 걷기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됐다. 직립보행하면서 두뇌 용량은 커졌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문명도 창조할수 있었다.

근대 이후 걷기는 예찬의 대상으로 성격이 바뀌어진 듯하다. 칸트에게서 규칙적인 산책이 없었다면 서양 근대철학이 어땠을까 싶다. 중년 이후엔 과학적인 걷기야말로 어떤 운동보다 낫고,하루 만보는 보약 못지않다는 연구결과는 이제 얘깃거리도 못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걷기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차량과 엘리베이터는 기본이다. 웬만한 곳에는 에스컬레이터까지 있으니 걷는다는 게 인류에 익숙지 않은 일이 돼버렸는지 모른다. 운동하겠다고 골프장에 가서도 '3보 이상은 걷지 않는다'며 무조건 카트를 타는 이들까지 있다.

나홀로 승용차족으로 도심이 꽉꽉 막히더니 걷기족과 두 발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교통 이용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인간의 행태를 바꾸는 것은 좋은 말,훌륭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려운 경제,고공행진하는 휘발유값인 것 같다. 동기야 어떻든 걷고 또 걸으면 좋은 일이 많다. 육신에 좋고,사색할 수 있고,경제적이다. 친환경적이며 타인에게 도움도 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