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그녀의 짙은 눈동자, 천개의 고독을 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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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서울예술대 교수·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지구촌에 불황의 그늘이 짙다.
봄은 오고 있지만 가슴은 여전히 춥다. 삶이 스산하고 불안하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위기의 시대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하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예술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도 고조되고 있다"고 이런 현상을 분석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화가가 천경자 화백이다. 천경자 화집을 펼치면 꽃과 여인,새와 나비,세계 각국의 풍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환상여행을 하는 느낌에 빠져든다. 그가 펼쳐낸 인물과 풍물,채색과 구도 속에 한 여인이 추구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알알이 배어 있다. 그래서 요즘처럼 바람이 차가울 때는 그의 화사한 색채와 감성적인 소재들이 그리워진다.
천경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화가다. 개인전마다 장사진을 쳤고,서울시에 작품을 기증하고 저작권까지 사회에 환원해 깔끔하게 주변을 정리한 유명 작가다. 한데 그는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작고(作故) 작가라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천경자는 생존해 있다.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큰딸의 수발을 받으며 몇 년째 투병 중이다. 지금 그는 한 마리 호랑나비가 되어 끝없는 환상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흔히들 천경자는 '한(恨)의 작가'로 알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정한(情恨),고독,슬픔 같은 감성이 배어 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한스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2006년에 펴낸 천경자 평전에서 천경자를 "인생을 축제처럼 산 팔자 좋은 화가"라고 표현했다. 천경자의 한과 고독은 세속적인 탄식이 아닌 창작의 원동력이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을 '내 슬픈 전설'이라고 했지만 화가로서의 그는 '불타는 예술혼으로 자신을 해방시킨 여자'였다. 충격적 소재인 뱀 그림으로 세상과 정면 승부를 했고,붓 하나 들고 세계를 누비며 지구촌 다큐멘터리를 엮어 냈으며,마침내 채색과 풍물로 '천경자풍(風)'이라는 독창적 예술세계를 일궈낸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화가다.
천경자의 '생태'는 작가가 내세운 1950년대 대표작이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그리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을 표출한 뱀 그림은 인습과 매너리즘에 빠진 당시 화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 소개하는'고(孤)''길례언니''사월' 등은 1970년대 초반에 그려진 천경자 풍의 대표적인 채색 인물화들이다. 천경자 화백은 보랏빛 정한의 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에 꽃과 여인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채의 여인 초상들을 많이 그렸다. '고'는 머리에 꽃을 이고 가슴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드는 슬픈 눈망울의 여인상이다. '4월'은 늘어진 등꽃을 화관처럼 쓰고 있는 화사한 여인상이다. 묘사나 채색기법에서 천경자풍의 모태가 된 '길례언니'는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을 만한 친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길례 언니는 작가의 유년기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멋쟁이 선배다. 집이 가난해 소록도의 간호사가 되어 어린 동생을 돌보던 그가 어느 여름날 축제에 노란 원피스를 차려입고 온 화사한 인상을 작가는 잊지 못한다. 금세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순결한 눈망울,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이었던 길례 언니를 작가는 아름다운 여인상으로 새겨 그녀와 대화하며 마음을 정화시키는 대상으로 삼았다.
1978년 나와의 인터뷰에서 천 화백은 이 시기의 작품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이에요. 그 속엔 내 슬픈 생애들의 단면들이 숨쉬고 있어요. 화사한 보랏빛 행복과 꿈을 머금은 꽃,상상의 나래를 펴는 나비가 있지만 그 밑을 흐르는 것은 연인의 진한 한(恨)이에요. "
천경자 화백의 미학 세계는 4차원을 지향했다. "4차원의 세계에 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려보는 것이 꿈이에요. 눈빛이 강하고 금분을 짙게 입혀 피부가 금빛을 띤…."
공해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섬뜩하고 공포를 지닌 군상들을 금속성의 색채로 표현해보고 싶어한 천 화백의 상상력은 경제 한파가 드리운 요즘 대중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괴기스러운 눈빛이 무섭기는커녕 강한 호소력이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 천경자는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신들린 듯이 세상을 살았고 문학적 상상력과 해외 스케치 여행을 통해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천경자 풍'을 이뤄냈다. 그의 초기작 '단장'과 '목화밭에서'는 덕수궁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더 진한 감동을 받고 싶은 팬들에게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천경자 특별실'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