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노동의 신성함 일깨운 '워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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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현 <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교수>
지금 '워낭소리'가 드높다. 1월15일 7개 상영관에서 조용하게 개봉했던 저예산 독립영화가 대박영화로 거듭난 것이다. 개봉 후 한 달 반가량 된 현재 270여개로 상영관이 늘었고,1억3000만원을 들여 만든 영화가 관객 160만명에 이르고 50여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단다.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원스'를 누리고 독립영화 사상 흥행 1위를 달성했다니,대통령까지 직접 가서 볼 만하다.
왜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열광할까. 당연히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나은 인간과 소 사이의 교감과 배려,사랑이 잔잔하게 전해질 때면,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ld Partner'인지 이해하게 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늙은 나귀처럼 서로가 서로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은 드디어 할머니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든다. 그래서 영감 잘못 만나 평생 소보다 못한 인생을 산다는 할머니의 유려한 풍자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한편으로는 소처럼 일해서 9명의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킨 부모의 헌신과 노고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소처럼 고단했던 부모들의 인생은 그 자체로 자식들에게 죄의식을 유발시키는 아킬레스건이다. 시대가 어려우면 반드시 유행한다는 복고나 향수 신드롬과 맞물려 IMF때처럼 보수적인 아버지의 가치가 부활한 것이라는 혐의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해석을 떠나 '노동'의 측면에서 이 영화를 다르게 생각해 보자.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리뷰를 검색하던 중 재미난 논점을 발견했다. 소수 의견이었지만,왜 불쌍한 소를 학대하느냐는 비난이 있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꼴을 베서 먹이는 것마저 소를 노예처럼 부려 먹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으로 본다.
이 영화에서 소는 40살인데,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100살이 넘는단다. 이 소는 할아버지와 함께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은 늙은 소와 할아버지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나란히 함께 걷는 장면이다. 의외로 그들의 표정에는 고통도 없고,기쁨도 없다. 오로지 삶만이 있다. 어떠한 과장과 생략도 없는,날 것의 삶 그 자체 말이다.
할아버지는 소를 부려먹지 않는다. 할아버지도 소와 함께 항상 일을 한다. 단순히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편하게 농사를 지으려면 농약도 뿌리면서 기계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손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은 소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손과 발이다. 또 할아버지는 국가를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할아버지에게는 논과 밭이 곧 세계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일을 할 뿐이다.
볼테르는 "노동은 우리를 권태,악덕,욕심이라는 3대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계화나 자동화로 인한 고용없는 성장 때문에 피로를 모르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점점 빼앗는다고 경고했다. 물론 지금은 경제 불황으로 인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할아버지와 소의 삶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농촌 판타지'라거나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사이비 다큐멘터리'라는 의혹을 없애려면 소처럼 일하는 인간의 삶만이 숭고할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한다. 워낭소리는 소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들리지 않는다. 인간은 힘든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일을 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도 낭랑한 워낭소리를 듣고 싶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자 존엄성을 대표하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좋다.
왜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열광할까. 당연히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나은 인간과 소 사이의 교감과 배려,사랑이 잔잔하게 전해질 때면,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ld Partner'인지 이해하게 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늙은 나귀처럼 서로가 서로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은 드디어 할머니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든다. 그래서 영감 잘못 만나 평생 소보다 못한 인생을 산다는 할머니의 유려한 풍자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한편으로는 소처럼 일해서 9명의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킨 부모의 헌신과 노고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소처럼 고단했던 부모들의 인생은 그 자체로 자식들에게 죄의식을 유발시키는 아킬레스건이다. 시대가 어려우면 반드시 유행한다는 복고나 향수 신드롬과 맞물려 IMF때처럼 보수적인 아버지의 가치가 부활한 것이라는 혐의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해석을 떠나 '노동'의 측면에서 이 영화를 다르게 생각해 보자.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리뷰를 검색하던 중 재미난 논점을 발견했다. 소수 의견이었지만,왜 불쌍한 소를 학대하느냐는 비난이 있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꼴을 베서 먹이는 것마저 소를 노예처럼 부려 먹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으로 본다.
이 영화에서 소는 40살인데,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100살이 넘는단다. 이 소는 할아버지와 함께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은 늙은 소와 할아버지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나란히 함께 걷는 장면이다. 의외로 그들의 표정에는 고통도 없고,기쁨도 없다. 오로지 삶만이 있다. 어떠한 과장과 생략도 없는,날 것의 삶 그 자체 말이다.
할아버지는 소를 부려먹지 않는다. 할아버지도 소와 함께 항상 일을 한다. 단순히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편하게 농사를 지으려면 농약도 뿌리면서 기계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손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은 소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손과 발이다. 또 할아버지는 국가를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할아버지에게는 논과 밭이 곧 세계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일을 할 뿐이다.
볼테르는 "노동은 우리를 권태,악덕,욕심이라는 3대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계화나 자동화로 인한 고용없는 성장 때문에 피로를 모르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점점 빼앗는다고 경고했다. 물론 지금은 경제 불황으로 인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할아버지와 소의 삶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농촌 판타지'라거나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사이비 다큐멘터리'라는 의혹을 없애려면 소처럼 일하는 인간의 삶만이 숭고할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한다. 워낭소리는 소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들리지 않는다. 인간은 힘든 일을 할 때가 아니라 일을 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도 낭랑한 워낭소리를 듣고 싶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자 존엄성을 대표하니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