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들이 없다. 딸만 있어 간혹 섭섭하다고 느낀 적은 있었다. 그렇다고 매우 안타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젠 대를 이을 장손이 없어도 괜찮다는 배짱(?)도 생겼다.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주말마다 사람 사는 집 같다. 두 동갑내기 외손자 덕분에 마냥 즐겁고 화목해진다. 두 놈이 잘 놀다가도 금세 싸우고,악을 쓰다가도 다시 사이좋게 지낸다. 사람들은 가끔 외손자들의 방문에 대해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라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나는 외손자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면 여간 서운하지 않다.

두 손자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형이 일방적으로 동생을 제압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덩치가 크지만 다소 소심한 동생이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가 지난 작년 여름부터 전세는 역전돼 덩치가 좀 작은 형이 슬그머니 백기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큰 놈은 총명,활달,감칠 맛이 있고 작은 놈은 듬직,신중,집중력이 뛰어나다.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지는 것은 서로 양보를 안 해 곧잘 싸움판이 벌어진다.

손자들은 국어 영어 수학 수영 등의 과외수업을 받는다. 형은 이 밖에도 한자공부에 관심이 많다. 취학 전에 이미 한자 5급 검정시험에 합격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와는 달리 동생은 축구,인라인 스케이트에 남다른 실력을 갖고 있다. 학교공부 외에 이렇게 많은 과외수업을 받고 또 시간을 쪼개 자기들이 좋아하는 분야에 공을 들이는 것을 보니 여간 대견스럽지 않다. 물론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뒤질세라 달달 볶고 있는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라 불쌍해진다. 말 많은 공교육의 문제점이 내 손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지금부터 59년 전 6 · 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내 어린 시절은 여유있고 평화로웠다. 손자들의 어머니인 내 딸이 30년 전에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요즘같이 살벌한 과외지옥은 없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고 교육 환경과 주변 여건이 각박해지다 보니 우리들의 손자들은 가혹한 과외전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앞으로 30년 뒤 내 손자들이 낳은 자식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그때의 교육 현실은 어떻게 될까.

60년이 지나면서도 악화일로만 걷고 있는 우리 교육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내 증손자 시대의 교육은 기계인간 아니 로봇인간을 만들어낼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한자공부에 여념이 없는 큰 손자가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사자성어의 뜻을 물어왔을 때 아찔했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한자를 알고 있나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이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 교육이 잘못돼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들 교육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