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그가 속삭인다. /이런!삶을,삶을 살아낸다는 건…/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 중>

황동규 시인(70)이 열네 번째 시집 《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을 펴냈다. 《꽃의 고요》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시집에는 일상에서 길어낸 삶에 대한 깨달음을 전하는 시편들이 실렸다.

표제작 <겨울밤 0시 5분>에서 시인의 눈에는 마을버스 종점에서 막차로 귀가하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한 여자가 들어온다. 여자 곁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인은 하늘 위 별의 말을 듣다 대꾸할 뻔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그대들은 뭘 기다리지?안 올지 모르는 사람?/어둠이 없는 세상?먼지 가라앉은 세상?/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누가 헛기침을 했던가,/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에서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

시인은 감각을 활짝 열어 삶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그 뒤편에서 불분명하게 실체를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퍼올린다. <삶의 맛>에서는 환절기 감기에 시달리다 회복되는 순간을 '오늘 아침 문득/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이라고 잡아내고 '이 세상 뜰 때/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이라고 노래한다.

또 <무릇-이승원에게>에서는 '속속들이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해도/스스러워 할 건 없지./그동안 이 지상에서 나도/거개가 나보다 나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았어.'라고 조용히 말한다.

그렇게 시인의 눈 앞에는 삶이 주는 깨달음이 가슴 벅차게 피어나고,시인의 예리한 감각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버린 집터들에 동백만 탐스럽게 피는 섬,/오늘은 제 숨결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뵈지 않는 몸속 도처에/생꽃 불놀이 불질하는 일보다/더 벅찬 기쁨 또 어디 있으랴!…(중략)/놀 속에서 놀랍게 섬이/티 나는 배꼽춤을 출 것이다. '(<속 기쁨> 중)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