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쇄 위원장…무교섭 임금 타결 이끌어

오종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은 울산고를 졸업한 뒤 중소기업 생산직으로 일하다 1983년 현대엔진(1990년 현대중공업과 합병)에 입사했다.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7년 노조를 조직해 교육홍보부장을 지냈고 그해 파업을 이끌며 전국을 파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데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파업주도 혐의로 회사에서 해고된 그는 1988년 해고자 신분으로 현대엔진 파업을 지원,제3자 개입혐의로 구속됐다. 1990년 현대중공업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의장을 맡은 뒤 다음 해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을 결성,울산을 다시 한번 긴장시켰다.

계열사 파업을 주도하다 두 차례 더 구속됐고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4년에 달할 정도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노총 금속연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해고 15년 만인 2003년 현대중공업에 복직됐다.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을 비판해 파문을 낳기도 했다. 2007년 10월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이성희 위원장…민주노총과 결별 선언

이성희 인천지하철 노조위원장(40)은 1980년대 말 화물선 기관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노동운동가로 변신한 특이한 케이스다. 그는 일본 상선회사에 기관사로 취업,'마도로스'의 꿈을 펼쳤다. 1999년 인천지하철에 입사해 노조 전임(專任) 총무부장을 맡는 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2005년 말 위원장에 당선된 그는 민주노총의 투쟁노선에 반발,조합비 지급을 중단했고 조합비 미납으로 인천지하철은 민주노총으로부터 '정권(停權 · 권한정지)' 조치를 받았다. 이 때부터 인천지하철은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최근엔 민주노총과 결별을 선언,9일과 10일 민노총 탈퇴 여부에 대한 조합원 투표를 벌인다. 그는 노동운동가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하다. 지하철 교대 근무제를 이용해 하루 3시간씩 자며 연세대 도시공학과(학사)와 행정대학원(석사)을 마쳤고 현재 연세대 정보산업도시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김홍열 위원장…'투쟁만능주의' 탈피 앞장

김홍열 코오롱 노조위원장(50)은 대구에 있는 모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열여덟의 나이로 1978년 코오롱에 입사했다. 1988년 노조 설립 때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노조 창립멤버다. 그는 극렬투쟁가는 아니였다. 하지만 그해 노사 대표가 20%의 임금 인상률에 합의한 것에 격분,삭발투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당시 대의원 신분으로 교섭권을 위임받아 재교섭에 나서 38%의 임금 인상률을 얻어냈다.

그는 품질관리 명장 출신으로 업무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업무능력은 강경파들로부터 비판의 구실이 됐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 왜 사용자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애쓰냐는 어처구니 없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코오롱노조는 1996년에 민주노총에 가입하면서 구미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노조로 변했다. 코오롱노조는 2004년 64일간의 장기파업을 벌이는 등 투쟁 만능주의에 빠져있었다. 김 위원장은 2006년 민주노총 탈퇴를 이끌었다.


정연수 위원장…공기업 노사화합 선언 주도

정연수 서울메트로(옛 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53)은 경북 상주고를 졸업하고 1981년 서울메트로에 입사한 뒤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1987년 서울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배일도 전 위원장과 함께 서울메트로 노조를 설립,초대 노조 법규부장을 지내며 강경투쟁을 주도했다.

그는 1990년대 들어 서면서 대의원과 중앙위원 등으로 조직 활동은 계속 했지만 강경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매년 파업을 주도해 국민들로부터 '파업철(罷業鐵)'이란 비판을 받게 만든 강경투쟁이 종식돼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 2월9일에는 서울지역 5개 공기업 노사 대표가 참여한 '서울시 공기업 노 · 사 · 정 화합 · 평화 및 사회공언 선언'을 이끌었다. 지난해 10월과 11월에는 40여일 동안 현대중공업 노조원 1만8000여명에게 노동운동 방향 강의를 했다. 14대 위원장을 지낸 뒤 지난 1월 16대 위원장에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