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중기…공단 가 보니 "공장 급급매 내놓고 덤핑으로 하루하루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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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량 1년새 3분의 1 토막…정상가동은 10곳 중 2곳 뿐
"정부, 대출확대 말만 말고 지원대상 콕 찍어 줘야…"
"정부, 대출확대 말만 말고 지원대상 콕 찍어 줘야…"
"자재대금을 갚고 직원 월급도 주기 위해 살던 집마저 은행에 잡혔습니다. 이런 상황이 몇 달 더 가면 회사는커녕 가족들이 거리로 쫓겨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기계부품업체 T사의 박모 대표는 9일 "작년 3~4월에만 해도 일주일에 2~3일씩 밤 10시가 되도록 잔업까지 했는데…"라며 연신 담배를 피웠다. 연간 120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회사는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주문이 감소해오다가 지난 2월에는 예년보다 주문량이 약 60% 줄었다. 박 대표는 "이젠 세상 살 자신까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 안 보이는 불황으로 중소기업들은 이익 창출은커녕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사한 지난 1월 현재 중소기업 평균가동률은 62.6%.정상 가동업체(가동률 80% 이상)의 비율은 22.4%로 지난해 같은 기간(42.1%)에 비해 반토막났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잘 돌아가던 기업 2곳 중 1곳이 정상 가동을 못할 정도로 어렵다는 얘기다. 애써 생산한 물품을 팔고도 대금을 제대로 못 받거나 거래처의 어음 결제 지연 등으로 돈줄까지 마르는 등 경영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직원 20명 미만의 소규모업체들 간에 덤핑경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떻게든 현금을 마련해 살아남겠다는 사업주가 늘어난 탓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베어링을 생산하는 금속가공업체 Y금속은 지난 2월 말부터 1만3000원짜리 부품을 약 40% 내려 개당 7500원 정도에 공작기계 제조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수입 원자재 가격이 40% 가까이 뛰어 마진을 일부 포기하더라도 단가를 30% 이상 올려야 할 판인데도 어쩔 수 없었다. 지난달 중순 경쟁 업체가 개당 8000원으로 내리면서 Y사의 거래처를 뺏는 방식으로 매출액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상황이 조금 낫다는 대기업 협력사들도 납품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해 자금난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다. 경남 창원에서 브레이크패드를 만드는 E사는 지난해 키코(KIKO)로 약 20억원을 손해본 데다 올해부터는 한 달짜리 어음이 3개월로 만기가 연장됐고 주문량도 전년 동기 대비 40% 가까이 줄었다. 오모 대표는 "정부는 은행권에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고 압박하지만 실제로 돈을 빌리러 가면 조건이 더 빡빡해진 것은 물론 신규 담보 제공까지 요구한다"며 "대기업은 고통을 중소기업에 떠넘기고 은행문턱은 빌딩 꼭대기만큼 높아졌는데 정부가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지원 대상을 선정해 주기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도무지 경기회복 기미조차 없자 일부 중소기업들은 구조조정과 폐업까지 검토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관계자는 "지난해 8월과 비교하면 폐업 관련 상담이 10% 이상 늘어났다"며 "이대로 간다면 중소제조업의 근본이 흔들릴 것이 뻔해 우려된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 있는 기계부품업체 S사는 지난 2월까지 매출이 예년보다 70%가량 줄어 무기한 휴무냐,구조조정이냐 여부를 놓고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예 사업을 접으려 해도 '퇴출'도 어렵다. 남동공단과 반월 · 시화공단에는 지난해 말부터 시세보다 10% 이상 싼 공장 급매물이 20% 정도 늘었지만 사려는 발걸음은 뜸해졌다는 것이 공단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의 설명이다. 경기도 안산시 목내동에 있는 M부동산 허모 대표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매물이 없어도 사겠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매물은 늘고 급급매까지 나왔지만 막상 살 사람은 없다"며 "공장을 내놓겠다는 전화만 하루에 많게는 5통씩 걸려온다"고 말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관계자는 "조업 감소로 인한 여유시간을 신기술이나 신상품 개발의 기회로 삼겠다는 기업들도 있지만 대부분 견디면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버티고 있다"며 "정부나 은행,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의 고통분담을 위한 다각적인 지원에 조속히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기훈/강유현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