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봄볕이 좋은 날에는 출석 도장만 찍고 마음 맞는 친구와 강의실을 나섰다. 학교 잔디밭에 누워 햇살을 받으며 잠도 자고 책도 보며 빈둥거리는 맛이 좋았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때 생각이 났다. 지겹게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모처럼 봄 기운이 느껴지는 날이다. 이런 날에는 하늘이 제일 잘보이는 곳으로 나들이 가야 한다는 생각에 남한산성을 목적지로 정했다.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에 도착한 것이 오전 10시30분.택시로 갈아탄 다음 "남한산성 입구요!"라고 외쳤다. 기사 아저씨의 질문이 되돌아왔다.

"어느 입구요? 남문도,입구 유원지도 있고,산성 종로 쪽도 있는데?"

사전 조사가 부족하면 역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나 보다. 망설이지 않고 "유원지요!"라고 외쳤다. 이렇게 맑은 날에는 '유원지'라는 단어가 끌리는 법이다.

남한산성 유원지에 도착하니 더욱 당황스럽다. 산책로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사람들의 복장이 전문 산악인 수준이다. 스틱을 짚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운동화를 신고 오긴 했지만 덜컥 겁이 났다. 다른 입구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한다는 어느 아저씨의 말에 할 수 없이 그냥 오르기로 했다.

볕이 좋다고는 하지만 역시 자외선에 피부가 상할까 걱정이 된다. 유원지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등산모자를 5000원에 샀다. 예비군 군복 무늬의 벙거지 모자가 카키색 점퍼와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산성까지 이르는 길은 아주 가파르진 않았지만 땀이 송글송글 맺힐 만큼은 됐다. 평일 오전 시간이다 보니 산행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40대 이상이다. 하지만 신체나이는 20대다. 숨 하나 차지 않고 웃고 떠들며 산성으로 오른다. 좀더 분발해야겠다.

배낭에 카세트를 꽂고 가수 장윤정의 '어머나'를 크게 틀고 가는 아저씨도 있다. 주변 사람이 오히려 더 흥겹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최신 음악을 크게 틀고 외제차를 몰고다니는 젊은이가 나이 들어 산에 오르면 분명히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중간에 약수터에서 목도 축여가며 천천히 오르니 성벽과 남문이 보인다. 유원지에서 45분 정도 걸렸다. 남문 앞에는 아예 팻말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쓰여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즈넉한 산성의 모습이 아름답다.

남문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한결 수월한 코스다. 함께 산성에 오른 할머니 말로는 남문주차장에서 시작하면 훨씬 더 완만한 경사로 올라올 수 있단다. 유원지에서 시작하면 '산행'이 되고 남문주차장에서 오르면 '산책'이 된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길은 부드럽다. 물 흐르듯 이어진 성벽을 따라 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에 이르는 구간을 걸었다. 성벽과 나란히 산책로가 뻗어 있는데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성벽 바로 옆 작은 흙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온 부모들은 콘크리트 길로 다니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성벽 너머로는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다. 저 멀리 아파트촌들이 보이지만 과거 병자호란 때는 그곳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인조는 청나라 군대의 진격을 피해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 들어와 청에 머리를 숙이고 성을 나가기 전까지 47일 동안 눈앞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기분이 숙연해진다.

천천히 걸어 북문에 이르니 12시30분이다. 아침을 걸러 배가 몹시 고팠지만 길가에 있는 어묵,파전 등을 파는 식당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먹을거리들은 북문에서 10여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산성 로터리 주변에 많다는 얘길 들어서다.

산성 로터리에 있는 식당들은 손두부로 유명하다. 식당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승용차가 가장 많이 주차돼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손두부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좋았다. 닭매운탕이나 백숙,오리 훈제구이 등을 먹기 전에 입맛을 돋울 수도 있고,급하게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 볶은 김치와 같이 먹어도 좋고,아무 반찬없이 간장에 찍어 먹어도 담백하고 고소하다.

손두부는 한 접시에 5000~8000원,닭매운탕이나 오리 요리는 2만5000~3만5000원(3인분) 사이다. 어린이나 여성들은 손두부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다.

남한산성 주변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중앙주차장에서 경기도 광주방향으로 뻗은 10㎞ 가까이 되는 도로,성남 모란시장을 지나서 광주 방향으로 산성터널로 이어지는 길이 봄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다.

가는 길&코스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 하차,2번 출입구 앞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6,10,10-1,30,30-1,33-1,55,720,720-1번 버스를 타면 남한산성 유원지로 간다. 정거장에서 남한산성 유원지까지 걸으면 15분.8호선 산성역 2번 출입구로 나와 9번 버스를 타면 산성 종로까지 바로 갈 수 있다. 배차시간 10~15분.돌아갈 때도 산성 종로에서 9번 이용,산성역에서 내리면 된다. 자가용을 가져 갔다면 남문에서 가까운 남문 주차장이나 로터리 주차장 이용.주차료는 하루 1000원.남한산성도립공원 (031)742-7856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